EXAM이수민
목차
디지털 인문학에 대하여 본인의 생각을 서술하시오.
디지털 인문학은 인문학과 디지털을 결합시켜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을 가깝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실물 책을 연구하는 전통적인 인문학 연구 방법에서는 할 수 없었던 것들을 기술과 연계함으로써 새로운 측면의 인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일반 사람들이 흔히 느끼는 인문학은 멀게만 느껴지고,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접하게 되는 자료들은 꽤나 오래되어 어려울뿐더러 먼 훗날 해당 자료들이 실존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미지수다. 그렇기에 우리는 디지털 인문학이라는 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인문학 자료들의 보존, 사람들에게 가까워질 수 있는 인문학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디지털 인문학이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현재와 같이 디지털 인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사회에서는 그러한 가치를 보여줄 수 없다. 따라서 현재로서는 디지털 인문학에 대해 알리려는 노력이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디지털 인문학에 대해 접할 기회가 현저히 떨어지기에 이대로는 그 장점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을 것이다. 디지털 인문학을 활용한다면 얻게 될 장점, 디지털 인문학을 통해 볼 수 있게 되는 것들에 사람들이 더 가까워져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인문학에 가까워질수록 디지털 인문학의 발전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한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 중 1개를 선택하여 서술하시오.
경복궁
개설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도성의 대표적인 궁궐이다. 1395년태조 4 처음 건설되었고[1]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었다가[2] 1865년고종 2의 공사를 통해 중건되었다[3].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정면에 세워지면서 왕실 궁궐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조선물산공진회’ 등을 겪으면서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다. 2011년 현재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며,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7호[4]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인 배치는 고대 중국의 궁궐 배치 수법을 따르는 전형적인 형태로, 남·북 방향의 축선을 따라 주요한 문(門)과 전각이 배열되었다.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편전인 사정전(思政殿), 침전인 강녕전(交泰殿)과 교태전(交泰殿)을 중심으로 광화문(光化門), 건춘문(建春文), 영추문(迎秋門), 신무문(神武門) 등 4개의 대문이 있고 경회루(慶會樓), 자경전(慈慶殿), 자미당(紫微堂) 등의 내전 전각과 자선당(資善堂), 비현각(丕顯閣) 등의 동궁 전각 등이 있는 전체 7,000여 칸에 이르는 규모였으나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경복궁은 『세종실록』 「오례」 혹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서 의례의 규범을 만들 때 기준이 된 공간이다. 『국조오례의』에서는 근정전, 근정문, 사정전, 중궁의 정전인 정전, 왕세자의 정당인 정당, 혼전, 빈전 등을 의례의 주요 공간으로 정립하였다. 이 중 근정전, 근정문, 사정전은 전각의 이름을 명확히 표현하였지만 정전, 정당, 혼전, 빈전 등은 건물의 용도만을 표현하였을 뿐이다. 단, 『세종실록』의 「오례」에서는 정당 대신 자선당(資善堂)이라고 동궁의 전각 이름을 명시하였다. 『국조오례의』 의례 체계는 법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지만 법대로 모든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 특히 상참 의식은 조선중기 이후 거의 명목만 남게 되었고 경연을 중심으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조회 의식의 약화와는 반대로 진연, 진찬은 대규모로 빈번하게 진행되어 내전 의식이 강화되는 경향이 컸다.
경복궁이 창덕궁 등 다른 궁궐과 다른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은 배치법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광화문에서부터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등을 직선상에 배치한 것은 여타의 궁궐이 병렬적인 축을 구성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뿐만 아니라 다른 궁에는 외전과 내전의 경계적 성격을 갖고, 국왕이 독서하는 공간이자 대신들을 편하게 만나는 야대청(夜對廳)으로 종종 사용되던 건물이 있었다. 창덕궁의 희정당, 창경궁의 숭문당(崇文堂), 경희궁의 흥정당(興政堂)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경복궁에는 이러한 성격의 전각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아서 중종은 경복궁에 야대청이 따로 없음을 지적하면서 임시변통으로 동궁에 속한 비현각을 사용하기도 했다[5].
궁궐과 관련한 스토리텔링 주제 1개를 정해 서술하시오.
왕의 일상음식
미디어(드라마, 영화 등)에 나온 궁궐 음식 확인하기
'영조실록'엔 "왕의 식사는 하루 다섯 번이다"라고 적혀 있다. 문헌에 따르면 수라상은 두 번이고 나머지는 간식이다. 영화에서 팥죽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왕이 항상 진수성찬을 먹지는 않았다. 백성의 아픔을 감안해 반찬 가짓수를 줄이거나(감선), 고기반찬을 치우기도(철선) 했다. 첫 번째 수라가 들어왔을 때 하선은 게걸스레 음식을 비운다. 그도 그럴 것이 기방에서 만담과 음담패설로 눙치며 살던 광대가 하루아침에 임금이 되어 산해진미 수라를 받으니 그 다음은 불을 보듯 빤한 일. 임금의 식사가 예사 음식이던가.
정조 시기 일상식
『원행을묘정리의궤』에는 왕과 자궁(慈宮, 혜경궁 홍씨)과 여형제들이 한성 경복궁을 출발하여 화성에 가서 진찬(進饌)을 베풀고 다시 환궁할 때까지 8일간의 식단이 권4 찬품(饌品)조에 자세히 실려 있다.
따라서 정조 시기의 일상식의 면모를 볼 수 있는데, 크게 정식인 반수라(飯水刺)와 간식인 반과상(盤果床)으로 나뉜다. 반수라에는 조수라(朝水刺), 주수라(晝水刺), 석수라(夕水刺)가 있으며, 반과상에는 죽수라(粥水刺), 미음상(米飮床), 조다소반과(早茶小盤果), 주다소반과(晝茶小盤果), 만다소반과(晩茶小盤果), 야다소반과(夜茶小盤果), 주다별반과(晝茶別盤果) 등이 있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에 올린 진찬이 있었던 특별한 날이나 행로 중에 끼니 사이의 공복을 채우고 보양식의 개념으로 올렸던 미음을 제외하면, 혜경궁 홍씨는 평균적으로 하루에 5~6회 상차림을 받았다.
윤2월 11일은 혜경궁 홍씨가 화성행궁에 하루 종일 기거하면서 다섯 번의 상차림을 받는다. 하루 중 처음에는 죽수라를 올리고, 식사 시간에는 조수라와 석수라를 올리며, 그 사이사이에 반과상을 올렸다. 죽수라는 항상 이른 아침에 올리는데, 조수라나 조다소반과가 이를 대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죽수라가 점심, 오후, 저녁에 오르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수라는 올리는 시간에 따라 조수라, 주수라, 석수라로 나뉜다. 반과상은 올리는 시간이나 상차림의 규모에 따라 조다소반과, 주다소반과, 주다별반과, 만다소반과, 야다소반과 등으로 지칭되는데, 국수를 위주로 한 다과상차림이다. 점심이나 야참처럼 수라 사이에만 올렸던 것이 아니라 윤2월 9일의 경우처럼 죽수라를 대신하여 반과상이 오르기도 하였다. 왕의 여동생인 군주들도 행차에 동행했는데, 왕의 수라는 같이 간 군주와 같은 상차림었다. 동행한 내외빈과 궁인 및 여러 신하들에게도 품수를 적게 한 반상을 차려주거나 두레반식으로 차리는 상차림으로 식사를 제공했다.
식재료나 음식은 수라가자(水刺架子)에 싣고 갔다. 원행 중 들르는 행궁마다 5~10칸짜리 임시 수라간[水刺假家]를 설치하여 자궁, 정조, 두 군주에게 올릴 음식을 준비하여 상차림을 차려냈다. 행행 중이라 상차림의 횟수나 종류, 음식 내용이 본궁에 기거할 때의 일상식사 내용과 똑같았는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그에 준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는 있다. 정조는 예행연습 도중 신하들이 원행 중 과잉충성을 염려하여 여러 가지 지침을 내렸는데, 그 중 “진이한 음식을 구해다 바치지 말 것”과 “왕의 수라는 10여 그릇을 넘지 않도록 할 것”을 엄명한 것을 보면 궁중에서의 수라상은 더 잘 차렸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국채보상운동 디지털 아카이브를 이용하고 개선점 및 오류 등을 5개 항목 이상 작성하시오.
1. | 메뉴에서 아카이브 검색, 전문 검색 카테고리를 눌러서 내려보았을 때, 여러 자료들이 사진과 함께 뜸으로써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나, 사진이 없는 자료에 대해서는 ‘NO IMAGE’라고 너무 크게 떠서 보기에 좋지 않을뿐더러, 자료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6] |
2. | 아카이브 통계보기에서 볼 수 있는 원형 차트는 너무 많은 자료가 한 번에 들어있어 해당 퍼센트를 나타내는 이름들이 겹쳐서 나타난다. 현재 차트와 같이 겹치는 글들이 너무 많아 글을 확인할 수 없다면 차라리 글을 삭제를 하는 등의 해결이 필요해 보인다.[7] |
3. | 콘텐츠 보기에서 KIDS 국채보상운동 알아보기라는 카테고리가 있어, 어린아이들도 국채보상운동에 대해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당 내용이 아이들의 이해를 도울 만한 수준과 내용인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 같다.[8] |
4. | 카테고리 중 1907 KOREA로 연결되어 있는 대구 1907이라는 사이트는 설명이 지나치게 간략하게 되어있다. 자세한 설명이 제시되어 있는 '네트워크 그래프'라는 부분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이용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9] |
5. | eBook 검색 카테고리에는 어떤 전자책들이 있고, 어떤 것을 확인할 수 있는지 궁금하였지만, 예시나 목차로 다른 책들이 제시되어 있지 않아 검색창 밖에 볼 수 없었다. 연도를 설정하여 검색해 보고자 하였으나, 검색 결과가 없다는 말 밖에 볼 수 없었다.[10] |
참고문헌
- 한식재단, 『조선 왕실의 식탁』, Hollym, 2014
참고사이트
-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문화재청 경복궁』, 경복궁관리소
- 『위키실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