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태전
개설
경복궁은 1395년(태조 4)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며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조성된 첫 궁궐이다. 그러나 태종이 주도한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1399년(정종 1) 개경으로 환도하여 경복궁은 4년 만에 빈 궁궐이 되었다. 1405년(태종 5) 태종이 한양으로 다시 돌아왔지만 경복궁 대신 창덕궁으로 거처를 정했으며, 이때부터 조선의 궁궐은 법궁과 이궁을 함께 운용하는 체제를 확립하였다(『태종실록』 5년 10월 25일).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복궁의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후 1868년(고종 5) 경복궁이 재건되어 왕실이 이어하기까지 276년간 빈터였으며, 유명무실한 존재로 법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이런 배경에서 경복궁은 명확히 초창기 경복궁과 중창기 경복궁으로 나눌 수 있다.
교태전은 초창기 경복궁인 태조 때의 궁궐 영건 안에는 없었던 전각이다.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따르면 경복궁의 내전은 보평청(報平廳)을 포함한 그 북쪽의 건물들이었다. 연침은 연생전(延生殿)·경성전(慶成殿)이라 하는 동·서 소침을 따로 둔, 7칸 규모의 좌우에 방을 두었고 사방에 행각을 두른 강녕전(康寧殿)이라는 전각이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따라서 통상적으로 경복궁의 강녕전은 왕의 침전이고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라고들 하나, 이는 세종대 이전의 경복궁에는 적용되지 않는 설명이다.
정종이 경복궁을 뒤로하고 돌아간 개경의 궁에도 ‘중궁’의 공간은 존재하였고 창덕궁이 운영되었던 태종대에도 중궁전은 존재하였는데 경복궁의 중궁전은 따로 언급이 없다. 당시 창덕궁 침전의 이름은 ‘대조전(大造殿)’이 아닌 ‘양의전(兩儀殿)’이었다(『세조실록』 7년 12월 19일). 이름 그대로 왕과 왕비가 함께 거처하는 침전이었던 것으로 미루어 동·서 두 개의 소침을 가졌던 강녕전 또한 왕과 왕비가 함께 거처한 침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교태전이 건립되기 이전까지 경복궁에서 거처하는 왕비에 관한 기록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태조의 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는 경복궁을 완공하고 왕실이 한양으로 이어한 지 일 년도 안 되어 승하하였는데, 그동안에도 병증에 시달리느라 주로 외부에서 머물렀다. 한양으로 돌아온 태종은 창덕궁을 영건하여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았다. 세종 때에 이르러 경복궁의 여러 전각이 보수되고 비로소 교태전을 건립하였다. 당시 『조선왕조실록』 기사에는 세종이 교태전을 건립하기 위해 왕과 왕비의 처소를 동궁으로 옮겼다고 하였다(『세종실록』 22년 9월 6일). 그러므로 ‘강녕전’이 창덕궁의 ‘양의전’처럼 왕과 왕비가 쓰던 침전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그 후 세종은 동궁의 궐내 거취 문제를 논의하면서, 강녕전·사정전 등은 정궁이지만 교태전은 자신이 세운 자그마한 집으로 정궁이 아니라며 교태전을 정의하였다.
세조대는 왕이 신료들과 함께 정사를 의논하고 왕비와 함께 연회를 베풀거나 외국 사신을 불러 나례와 같은 재주를 구경하고 접대하는 일 등을 교태전에서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