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유호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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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유호(都宥浩)
DoYu-Ho.jpg
출처 : 1966년 9월호 <새조선>[1]
 
한글명 도유호 한자명 都宥浩 영문명 Do Yu-ho 가나명 이칭 도정호(都定浩)
성별 남성 생년 1905년 몰년 1982(?)년 출신지 함경남도 함흥 전공 고고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한국 최초의 고고학자. 북한 고고학자. 1905년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1935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독일 여성과 결혼한 후 귀국하였다. 1946년에 월북하여 1947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되었다. 1960년대 초반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맡는 등 정계에서도 활약하였다. 굴포리, 지탑리, 궁산리 등의 북한 고고학 유적 발굴을 주도하였다. 그의 1960년 논문 ‘조선원시고고학’은 1960년대부터 1990년대에 걸쳐 북한에서 고고학 연구의 기초 논문이 되었다. 또한 황기덕과 공동으로 ‘지탑리 원시유적 발굴보고’를 작성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63년 『조선원시고고학』에서 문화의 전파이론을 채용한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위배되는 반동적 이론이라하여 호된 비판을 받았다. 1965년 이후 북한학계에서 사라진 그에 대해 여러 추측이 있지만, 일설에 의하면 백두산 부근의 중학교로 쫓겨났다가 그곳에서 죽었다고도 한다.[2]



생애


출생과 성장

1905년 5월 29일(양력 7월 1일)에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성주도씨(星州都氏) 사정공파(司正公派) 27세손(世孫)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함흥에서 비교적 유복한 가정이었다. 「학적부」(휘문고등학교 소장)에 그의 본명은 도정호(都定浩), 그리고 부친 이름은 도진오(都鎭五, 1874~1939)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큰형은 도용호(都容浩, 1895~?), 작은형은 도관호(都寬浩, 1900~?)이다. 이 두 사람은 식민지 시기에 사회주의자로서 항일운동을 하였다.[3] 함흥 영신학교와 함흥 영생학교 4년을 마치고 1922년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해 1923년 졸업하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도유호는 1923년 5월 초, 동아일보에서 1천호 발간 기념에 즈음하여 실시한 현상 문예에 응모하였다. 그는 도정호(都定浩)라는 이름으로 ‘가을 저녁’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시 부문에 당선되었다.[4] 같은 해 신흥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4년 짧은 교직 생활을 마치고, 1924년 4월 경성고등상업학교에 진학하였다. 3학년으로 진급할 무렵 병으로 인하여 1년간 휴학하고 금강산에 들어가 휴양을 하였다. 1928년 3월에 졸업하였다.[5]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그 해, 도유호는 일본으로 가서 고베상업대학(神戶商業大學) 입학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렇지만 상업대학에는 뜻이 없어 등록을 하지 않았다.[6] 자신이 원하는 학업을 닦기 위하여 일본이 아닌 중국 유학을 선택하였다. 도유호는 베이징 옌칭대학(燕京大學) 문학원에 편입하여 1928년 9월부터 1930년 정월까지 3학기 동안 학적을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7] 조선에 귀국한 그는 1930년 4월 경성을 떠나 유럽 유학 길에 오른다. 1930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한 후 여행기(「구주행 인도양 건너서서」)를 23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지금 본명처럼 굳어진 ‘도유호(都宥浩)’라는 필명은 이때부터 사용하였다.[8]


유럽 유학

도유호는 1931년 10월 프랑크푸르트대학(Goethe University Frankfurt am Main)에 입학하였다. 입학 당시 민족 문제에 대한 관심을 크게 가졌다. 지도 교수는 지식사회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칼 만하임(Karl Mannheim, 1893~1947)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 1933년 초 정권을 잡은 나치스는 만하임의 교수직을 박탈하였고,[10] 만하임은 1933년 봄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 문학부 교원 이력서 철에 포함된 도유호의 「이력서」(『金大, 敎員履歷書, 文學部』 1946)에 따르면, 당시 그는 히틀러 정권에 의하여 투옥되기도 하였는데, 이 사건은 만하임 교수 문제와 연루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11]

1933년 봄 독일에서 추방된 도유호는 오스트리아 빈대학(UniversitätWien, University of Vienna) 철학부 사학과로 전학하였다. 1935년 빈대학에서 Probleme der koreanischen Geschichte in kulturellem Zusammenhang (문화적 맥락에서 본 조선사의 문제)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논문의 주심사원은 유럽 중세사와 경제사에 관하여 업적을 남긴 도프슈(Alfons Dopsch, 1868~1953) 교수였다. [12] 학위논문에서는 고대(단군신화와 기자, 민족의 기원, 삼국의 경제와 사회 등), 중세(통일신라, 고려, 봉건제도 등), 근세(조선, 정체성 문제, 이념적–정치적 전개 과정 등)에 이르기까지 한국 역사와 문화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13]
비엔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나서 그는 곧바로 귀국하지 않았다. 1930년대 독일-오스트리아 민속학의 중요한 학맥을 형성한 인물들, 이른바 비엔나학파의 일원이었던 슈미트(Wilhelm Schmidt, 1868~1954), 코퍼스(WilhelmKoppers, 1886~1961), 하이네겔데른(Robert von Heine-Geldern, 1885~1968),멩힌(Oswald Menghin, 1888~1973) 등을 학문적인 스승으로 삼아 민속학과 선사학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갔다.[14] 또한 1934년 베를린에서 사망한 그레브너(Fritz Graebner, 1877~1934)도 도유호가 오스트리아에서 학업을 쌓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1938년 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일을 계기로 슈미트와 코퍼스는 스위스 프리부르(Fribourg)로 피신하였고, 하이네겔데른은 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멩힌은 병합 내각의 문화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도유호가 스승으로 삼았던 인물들이 모두 그의 곁을 떠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말미암아 도유호는 더 이상 에 머물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빈을 떠난 도유호는 1940년 1월 27일 경성역에 도착하였다.[15]

박사학위를 받은 후 도유호는 「支那社會史上으로 본 孔子와 老子(獨文)」(『진단학보』 8, 1937), “Proto-Schang und chinesische Zivilisation(原商族과 중국 문명)”(1938)을 집필하였다.[16]. 또한 그는 비엔나에서 동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카르눈툼(Carnuntum)의 로마시대 유적 발굴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다.[17]


유럽 유학 이후

귀국 이후 식민지 시기에 도유호가 발표한 논문은 모두 네 편으로 보인다. 그 가운데 「중국도시문화의 기원」이라는 글의 초고는 1939년 여름 비엔나에서 집필했으며, 귀국 후 진단학보 12~14권(1940~1941)에 발표했다.[18] 이 글은 그레브너, 슈미트, 코퍼스, 하이네겔데른, 멩힌 등의 주장을 자신의 견지에서 정리하고, 중국 도시문화의 기원에 대한 성격과 특징을 논했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적 발전법칙에 관한 헤르더(Johann Gottfried Herder, 1744~1803)의 인식을 토대로 하여 중국의 선사시대 및 고대사회 연구에서 제기되는 문제를 이른바 변증법적인 발전사관[19]에 의하여 해명하고자 하였다. 오늘날 중국 고고학과 고대사 연구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성과와 비교할 때, 당시 도유호가 전개한 논증 과정과 그 결과는 상당한 범위에서 유효성을 잃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독일-오스트리아의 민속학을 대표하는 빈학파의 문화권설을 적용하여 중국 고대사를 해석하고자 시도한 점은 한국 고고학의 학사적 측면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력서」에 따르면 귀국 후 도유호는 일제 당국으로부터 심한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아울러 당시 도유호는 국내 국학자들과 관계도 원만하지 못하였다.[20] 여러 사정으로 국내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한 도유호는 만주국 신경박물관(현재의 길림성박물관)에 취직한 바 있으며,[21] 1942년 3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 체류 중에는 인류학, 선사학, 고고학에 관한 독일어 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며 생활비를 충당하였다. 그가 번역에 참여한 책으로 『石器時代の世界史(석기시대의 세계사)』(岡 正雄 譯, 1943)가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22]
1945년 2월 일본에서 귀국한 도유호는 함흥에서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다음날 도유호는 진단학회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고,[23]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초청장 발송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24] 다만 도유호는 서울에 오지 않고 함흥에 그대로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함흥에서는 함흥시립도서관 관장과 함흥의과대학 강사로 임명을 받았다. 1946년 3월 서울에 온 도유호는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 이하 ‘민전’으로 약칭) 에 가입하고, 조선인민당 당원으로 활동하며, 조선과학자동맹 위원장을 겸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도유호는 자신이 가입한 정당에서 담임 공작이 ‘인민당 푸락치’였다고 「이력서」에 기재하였다. 인민당과 공산당에 당적을 걸고 있었던 도유호는 ‘인민당 내의 공산당 프랙션’으로서 활동한 것이다.[25]
1946월 9월 초 미군정청은 조선공산당 주요 당원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도유호는 10월 16일 삼팔선을 넘어 월북하였다. 1946년 10월 20일 도유호를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으로 채용하는 결정이 내려졌다.[26] 김일성종합대학 교원으로 임명된 이후, 1947년에 이루어진 대동강 연안의 석암리유적 발굴에 참여하였고,[27]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상무위원 및 조선력사편찬위원회 원시분과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28] 1949년에는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위원장: 한흥수)와 중앙력사박물관(관장: 황욱)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황해도 안악 제1호 무덤, 제2호(함박뫼) 무덤, 제3호(하무덤) 무덤의 발굴에 참여하였다.[29] 도유호는 1950년 당시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고고학 부장을 맡고 있었다.[30]

전쟁 중인 1952년 10월 북한에 과학원이 창설되었다. 당시 도유호는 통역장교로 근무하면서 과학원 후보 원사(고고학) 및 과학원 산하기구인 물질문화사연구소의 소장으로 임명을 받았다.[31] 물질문화사연구소는 1956년 고고학및민속학연구소로 개편되었는데, 도유호는 이 연구소 소장을 맡아 북한 지역 유적 발굴과 고고학 연구를 주도했다. 월북 이후 한국전쟁 이전까지 학술지에 발표된 도유호의 글은 모두 다섯 편 확인된다. 그 가운데 두 편은 황해도 안악의 고구려 무덤, 한 편은 고려 초기로 추정되는 강원도 철원의 봉선사지(奉先寺址), 나머지 두 편은 선사학의 유물사관적 고찰과 관련된 내용을 다뤘다.


연구


도유호와 한흥수의 논쟁 : 1948~1950

북한에서 도유호는 한흥수와 원시시대, 고고학 민속 등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면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상반된 주장과 접근 방법을 표명하며 원시사회의 성격, 생산관계, 혈연관계 등을 둘러싸고 여러 차례 학술 논쟁을 벌였다. 그들의 논쟁은 한국 고고학사의 측면에서 판단할 때,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사회주의적 분위기가 고조된 초기 북한 고고학계의 학문적인 동향을 반영한다. 둘째, 해방 이후 한국전쟁 이전까지 한국 고고학사의 빈틈을 채워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32]

1) 원시사회의 생산과 문제
한흥수는 원시사회의 생산 문제에 대해 “인류사회의 특성은 노동뿐이다”라는 직관적 유물론자의 주장에 찬성할 수 없으며, 원시사회에서 사회화된 생산은 거의 없었다고 주장하였다.[33] 이러한 의견에 도유호는 채취경제가 생산경제로 전화되는 원시사회에는 이미 재배와 목축이라는 생산형태가 지역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하였으며, 상호 교류에 의하여 문화가 질적으로 변화하고 생산력이 성장했다고 반박하였다.[34]

2) 원시사회의 생산과 소유
한흥수는 원시사회에서 소유는 공동적이며, 생산은 개별적이라고 주장하였다.[35] 그에 반에 도유호는 생산의 사회성은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생산관계, 곧 사회적인 생산관계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원시인의 사회적 생산을 개별적인 생산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36]

3) 원시사회의 산아율과 분업
한흥수는 원시사회의 산아율과 분업에 대해 자연법칙적인 산아율 제약으로 집단노동이 마무리 되었고, 이를 계기로 개인적인 분업이 점점 사회화되었다고 보았다. 또한 산아라는 비사회적 본성으로 야기된 씨족과 집단생활 사이의 대립과 통일을 거쳐 인간 생활은 더 향상된 사회 형태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였다.[37] 반면 도유호는 원시사회가 붕괴된 원인은 집단 사이에 균등하지 않았던 산아율에 있는 것이 아니며 그 원인은 공동노동에 따른 분업 발생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맬서스와 같은 부르주아 학자의 학설에 의지하여 원시사회의 인구 문제를 자연법칙으로 논하는 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였다.[38]

4) 혈족과 생산관계
한흥수는 혈족은 원시사회의 생산관계를 성립시키는 유일한 기본단위이자 생산에서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이라고 보았다.[39] 하지만 도유호는 생산형태의 변화로 인하여 모권 또는 부권과 같은 혈연관계가 유발되었다고 보았다.[40]

5) 혈족과 상부구조
한흥수는 혈연관계는 원시사회의 물질적 생산의 기본단위이자 전제조건이었기 때문에 혈연은 상부구조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도유호는 모권 또는 부권과 같은 혈연관계는 경제적인 생산형태의 변화에서 비롯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부구조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6) 문화권설
한흥수는 문화권설은 모든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에 역사적 근거와 이론적 원조를 제공하는 반동 학설이라고 비판했다. 역사의 발전 과정 중에 나타난 현상을 나열 분류하는 데 만족하는 ‘문화형’ 또는 ‘문화권’이라는 개념은 사회 발전의 발생학적 법칙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반면, 도유호는 문화권설이 반동적 학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만, 문화권설을 유물사관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예로 발상지가 서로 다른 지역의 문화권에 형성된 모권 문화와 부권 문화의 기원을 경제적 원인에서 찾으려고 한 그레브너의 사례를 들었다.

7) 문화 계통과 교류
한흥수는 민족과 문화는 역사적 과정을 통하여 형성된 산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 민족에 본래부터 고유한 문화의 순수성이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였다. 문화의 순수성을 부르짖는 사람들은 소위 문화의 계통만을 찾으려고 하며, 인류 사회의 발전 법칙을 무시하고 모든 문화가 처음부터 서로 다른 계통에서 출발한 것으로 본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도유호는 인류의 발달사를 유물사관적 방법론으로 해석하더라도,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서로 다른 계통의 문화가 존재했으며, 문화 교류에 의한 외적 영향이 인류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문화 계통의 차이와 그 필연적인 분화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천편일률적으로 발전만을 논하는 것은 올바른 접근 방법이 아니라고 보았다.[41]

8) 유물 형태와 종족 문제
한흥수는 특정 유물의 형태적 특성을 임의의 종족과 결부시켜 나열 분류하는 방법은 사회의 발전과 진화의 법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42] 하지만 도유호는 충분한 과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유물의 시대적 및 종족적 차이를 논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서 그 사회의 속성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43]

9) 예술품
한흥수는 고고학은 인류사회의 발전법칙을 이해하는 데 직접 이바지했던 생산기구의 형태학적 연구에 중점을 두어야 하며, 장식품이나 토우 등은 경제사적으로 주요한 연구 대상이 아니라고 언급하였다.[44] 반면 도유호는, 멩힌이 후기 구석기시대 미술 작품은 마법(魔法)을 행하는 과정에서 제작되었는데 이 마법은 생산행위이고 따라서 시술의 기원은 생산이라고 설명한 것을 과학적인 견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45]

10) 원시공동체 사회의 분해

한흥수는 국가의 형성 과정을 고찰하면서, 전쟁을 노예소유제 사회의 특징으로 인정할 수 없고 노예가 있다고 해서 노예소유제 사회인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46] 하지만, 도유호는 종족적 대립이 계급 대립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노예와 노예소유자라는 최초의 사회계급이 분화되었고, 이 계급 분화의 발생으로 노예 소유제 국가라는 정치 형태가 출현하였다고 보았다.[47]


토론과 논쟁의 시대: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북한에서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는 역사학과 고고학 부문에서 가장 활발하고 치열한 토론이 전개되었던 토론과 논쟁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1) 삼국 시대의 사회 경제 구조에 대한 문제
1950년대 중반 김광진과 도유호는 한국사에서 노예제 유무에 대하여 논쟁을 벌였다. 둘은 삼국 시대 사회 경제 구조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김광진은 한국사에서 노예제 사회의 존재를 부정하였고,[48] 도유호는 한국 고대에도 노예제도가 있었다고 반론을 제기하였다.[49] 도유호는 김광진의 주장이 마르크스-레닌주의 입장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이에 김광진은 도유호가 자신에게 던진 비판을 다시 반박했다. 김광진은 철기 사용에 관한 문제에서 중국의 영향을 과대평가한 자신의 견해를 일부 시정하였지만 “조선에 노예 소유자적 구성이 성립되었다는 주장은 그 근거가 과학적으로 논증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굽히지 않았다.[50]
1956년 10월 31일부터 11월 2일까지 과학원 력사연구소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서 한국사에서 노예제사회의 존재 유무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이루어졌다. 토론회에서 삼국 시기의 노예제사회를 부정하는 입장(김광진, 전석담, 로정환, 김세익, 이청원, 채희국, 정찬영 등)과 노예제사회를 긍정하는 입장(도유호, 림건상, 리능식, 백남운, 한길언, 강병도 등)이 열띤 발표와 토론을 펼쳤다. 토론회는 비록 노예제사회 유무에 대한 문제는 확정되지 못한 상태로 마감되었지만, 삼국 시기의 사회 구성을 해명하려면 이미 알려진 자료 이외에도 더욱 광범위한 문헌 자료들과 함께 고고학, 민속학, 언어학, 문학사적 자료들을 더욱 많이 탐구해야 하는 절실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51]
1956년 하반기에 이루어진 학술 토론회의 성과는 1958년에 『삼국 시기의 사회 경제 구성에 관한 토론회』(과학원출판사)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다. 이 단행본에서 제기된 주요 문제에 대하여 력사연구소의 고대 및 중세사 연구실에서는 관계자들을 중심으로 10여 차례의 토론회를 가졌다. 그렇지만 노예제 사회 존재 유무 문제를 해명하는데 직접 도움이 되는 구체적인 방안은 여전히 제시되지 못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1960년대 접어들어, 림건상과 김석형은 삼국의 사회 경제 구조에 대하여 상반된 입장을 취했지만,[52] “삼국 이전이 노예제사회였다”는 데에 기본적으로 합의를 보게 되었다. 따라서 연구 방향은 삼국 이전이 노예제 사회에 해당함을 본격적으로 밝히는 쪽으로 전환되었다.

2) 고조선 문제
1960년대 초 북한의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위치에 관한 논쟁이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연구자들은 ‘재만주설(在滿洲說)’과 ‘재평양설(在平壤說)’로 갈리게 되었다. 1961년에 김석형(金錫亨)을 비롯한 이지린(李趾麟)·임건상(林健相)·이상호·백남운(白南雲) 등 많은 문헌사가들이 ‘재만주설’에 동조하였다. 이에 대해 도유호를 비롯한 황철산(黃鐵山)·정찬영(鄭燦永)·황욱(黃澳) 등 고고학자들이 주장하는 ‘재평양설’은 점차 소수설로 전락하게 되었다. 1963년에 개최된 토론회에서 도유호 등의 ‘재평양설’은 마침내 사라지게 되고, 고조선의 ‘재만주설’만이 남아 북한학계의 정설이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도유호는 북한학계에서 설 자리를 잃었다.[53]

3) 초기 금속문화의 기원 문제
초기 북한 선사 고고학의 가장 큰 과제는 식민지 시기 고고학의 ‘극복’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한반도에 청동기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금속병용기’설에 대한 반론이었다. 지탑리 유적 발굴 조사로 금석병용기의 존재가 부정됨으로써 더 이상 금석병용기는 언급되지 않는다. 다만 문화 발전의 요인을 외래 요소에서 찾는 인식은 여전했다. ‘신석기시대 말엽에 벌써 대륙쪽에서 내려 미는 청동기 문화의 영향이 적지 않게 미쳤던 것’이라고 하거나,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이행을 ‘청동기시대 말엽에 쇠붙이를 사용하는 어떤 종족이 래주하였음을 암시하는 유물 출토 정형도 보이나 더 많은 경우는 재래의 주민이 그냥 철기시대로 넘어 갔음을 이야기한다’고 말하는 등 도유호는 문화전파론의 입장에서 외부 문화요소의 유입을 긍정했다.[54] 그러나 ‘과학적인 학문으로서의 고고학’을 추구한 이러한 도유호의 입장은 결국 그가 북한 고고학에서 축출되는 이유가 되었다.[55]

4)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기원 문제
1949년 황해도 안악의 고구려 벽화 무덤 발굴에 참여한 도유호는 벽화 내용에 대한 설명과 무덤에 나타나는 ‘고임 천정’의 기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소략하게 남겼다.[56] 그는 고임 천정의 형태는 돌멘 및 고구려 적석총과 연결될 가능성이 있고, 중앙 아시아 지역에도 분포하는데 두 지역 사이의 선후 관계는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말하였다. 채희국은 논문에서 고구려 석실봉토분을 고구려의 독창적인 묘제로 보았다.[57] 이에 더하여 “우리는 우선 문화 발전에 있어서 내재적인 요인과 외적인 영향을 변증법적인 통일 속에서 관찰하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이에 따라서 고구려에 있어서의 외래 문화의 영향 문제를 신중히 취급하여야 한다”고 말했다. 즉, 사회 변화와 발전은 외부적 요인보다 내부적 요인이라는 기본 골격에 근거를 두며 고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지만 도유호는 채희국의 주장이 역사적 계기성과 상호 관련성을 도외시하였다고 지적했다. 도유호는 석실의 천장은 서역 요소로서 서역의 영향이 고구려화되어 고구려의 특징이 되었다고 보고, 고구려의 고분 문화가 서역과 무관치 않음을 주장했다.[58] 이는 벽화분의 등장을 중국의 영향 일변도로 본 식민지 시기 해석과 달리 서역 요소를 부각시킨 것이다.
채희국의 시각을 반박하는 도유호의 논문이 발표된 뒤,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기원 문제에 대한 논쟁은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961년 유일사상 체계 수립을 위한 조치로써 주체적 방법론을 철저히 구현해야 하는 강령 지침을 계기로 입장의 변화가 있었다.[59] 주영헌은 고구려 봉토무덤의 기원과 변천에서 돌각담무덤[고구려 적석총]과 봉토분은 선후 관계를 가지는 한편 일정 기간 병존하였다고 설명하지만, 봉토분에서 중국 한나라나 서역의 요소가 보이는 것을 문화 교류의 현상으로 해석함으로써 묵방리식 변형 고인돌에서 기원한 봉토분은 유구하고 고유한 전통을 계승, 발전함으로써 변화 발전하였다고 주장하였다.[60] 이후 봉토분은 묵방리형 변형 고인돌 및 돌각담무덤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해석되었고, 돌각담무덤에서 돌칸흙무덤으로 변화는 북한 학계의 정설로 자리하게 되었다.[61]

결론적으로 고구려 봉토무덤의 기원과 관련된 주영헌의 고고학 분야 논문은 시대적 요구에 잘 부응하였다. 이에 반해 도유호와 같이 외래문화의 계기적인 역할, 곧 서역문화의 본질적인 영향이 고구려 고분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접근 방법은 더 이상 설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 뒤 전주농은 고구려 벽화무덤의 시원이 돌무덤에 있었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역시 고구려의 벽화무덤이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는 점에 관해서는 이론(異論)이 없었다.[62]


논저 목록

저자명 기사명 단행본/잡지명 권호 출판사 출판일자 분류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1) 동아일보 1930.09.02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2) 동아일보 1930.09.03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11) 동아일보 1930.09.16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20) 동아일보 1930.10.01
도유호 歐洲行 印度洋 건너서서(23) 동아일보 1930.10.05
도유호 苦悶의 獨逸에서, 타고翁의 訪獨, 米國品의 洪水, 失業擴大 동광 21 1931.5
도유호 獨逸留學日記 동광 25 1931.9
도유호 詩人 「꾀테」의 舊家를 찾고 (獨逸留學日記) 동광 26 1931.1
도유호 獨逸大學生의 生活(劍客男女 祼體生活 尖端戀愛) 동광 27 1931.11
도유호 民族問題에 對한 나의 誤謬 동광 28 1931.12
도유호 民族問題에 關하야 동광 30 1932.1
도유호 緊急抗議文 동광 33 1932.5
도유호 旋風부는 獨逸에서 동광 37 1932.9
도유호 彙報:都宥浩氏 書信(維也納로부터) 진단학보 5 1936
도유호 Konfuzius und Laotse im Lichte der Chinesischen Sozialgeschichte(支那社會史上으로 본 孔子와 老子, 獨文) 진단학보 8 1937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1) 진단학보 12 1940
도유호 感想 (上) 感謝와 訂正 조선일보 1940.04.24
도유호 感想 (中) 感謝와 訂正 조선일보 1940.04.25
도유호 感想 (下) 感謝와 訂正 조선일보 1940.04.25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1)” 조선일보 1940.06.01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2)” 조선일보 1940.06.04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3)” 조선일보 1940.06.05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4)” 조선일보 1940.06.07
도유호 “비엔나 그리웁다!(終)” 조선일보 1940.06.08
도유호 「「요세프·헥겔」씨의 「토템」主義論」 진단학보 12 1940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2) 진단학보 13 1941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3완) 진단학보 14 1941
도유호 安岳의 高句麗 壁畵墳 자연과학 5 국립인문출판사, 평양 잡지
도유호 安岳에서 發見된 高句麗古墳들 문화유물 1 조선물질문화유산보존위원회 1949 잡지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위한 몇개의 基本問題(상) 력사제문제 15(1집) 조선역사편찬위원회 1950 잡지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위한 몇개의 基本問題(하) 력사제문제 16(2집) 조선역사편찬위원회 1950 잡지
도유호 奉先寺址考 문화유물 2 조선물질문화유산보존위원회 1950 잡지
도유호 조선 석기시대 사상(史上)에서 새로 판명된 몇가지 사실에 대하여 력사과학 1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55 잡지
도유호 조선 력사상에는 과연 노예제 사회가 없었는가: 김광진 동지의 부정론과 관련하여 력사과학 3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56 잡지
도유호 정백운 라진 초도 원시 유적 발굴보고서(유적발굴보고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과학원, 평양 1956 보고서
도유호 민족 문화 유산의 계승 발전과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의 당면 과업 문화유산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7 잡지
도유호 황기덕 지탑리 유적 발굴 중간보고(1)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7 잡지
도유호 황기덕 지탑리 유적 발굴 중간보고(2) 문화유산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7 잡지
도유호 황기덕 궁산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2) 과학원출판사, 평양 보고서
도유호 조선 원시 문화의 년대 추정을 위한 시도 문화유산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8 잡지
도유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창건 10주년 기념 학술 보고회- 공화국 기치하 10년간의 고고학 및 민속학 연구소 사업 성과 문화유산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8 잡지
도유호 삼국 시기의 사회 경제 구성에 관한 토론집-삼국 시대는 봉건 시대가 아니다 력사연구소 편집, 과학원출판사 1958
도유호 안악 제 3호분 발굴 보고(유적유물보고 3)-머리말 과학원출판사, 평양 1958
도유호 안악 제 1호 및 제 2호분 발굴보고서(유적유물보고 4)-머리말 과학원출판사, 평양 1958
도유호 대동강 류역 고분 발굴 보고(고고학자료집 1)-서언 1958
도유호 조선 거석 문화 연구 문화유산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2 잡지
도유호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유래와 서역 문화의 영향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9 잡지
도유호 재령과 단천 지방에서 나온 몇 개 유물에 관하여 문화유산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59 잡지
도유호 태성리 고분군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5)-서문 1959 보고서
도유호 강계시 공귀리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6)-머리말 1959
도유호 회령 오동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7) 1960
도유호 초도 유적의 주인공에 관하여 문화유산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0
도유호 조선 원시 고고학 과학출판사 1960 저서
도유호 고고학에 관한 새 용어의 해설 문화유산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0 잡지
도유호 고조선에 관한 약간의 고찰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0 잡지
도유호 기원전 3~2세기에 조선 북부지역의 금속문화 제25차 국제동방학자 대회(소련, 모스크바) 1960.08.09.~1960.08.16 학술대회
도유호 고조선 문화에 대하여 력사과학 5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610908 잡지
도유호 황기덕 지탑리 원시 유적 발굴 보고(유적발굴보고 8) 1961 보고서
도유호 신천 명사리에서 드러난 고조선 독널에 관하여 문화유산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고고학이란 어떠한 과학이며, 력사 연구에는 왜 고고학이 필요한가? 문화유산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진번과 옥저성의 위치 - 고조선 령역 문제와 관련하여 -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빙하기란 무엇인가 문화유산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인류의 기원 문화유산 5 조선민주주의 1962 잡지
도유호 왕검성의 위치 문화유산 5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예맥조선에 관하여 문화유산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구석기란 무엇인가 문화유산 6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2 잡지
도유호 우리 나라 최초 국가 형성 과정에 관한 연구 발표되지 않음
도유호 1963년 중 고고학에서 거둔 성과 고고민속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3 잡지
도유호 조선의 구석기 시대 문화인 굴포 문화에 관하여 고고민속 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4 잡지
도유호 평천리에서 나온 고구려 부처에 대하여 고고민속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4 잡지
도유호 김용남 우리나라 구석기시대와 이른 신석기시대의 년대론에 대하여 력사과학 4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64 잡지
도유호 조선의 민속 놀이-다리밟이 군중문화출판사 1964
도유호 서평 : 금탄리 원시 유적 발굴 보고 고고민속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5 잡지
도유호 김용남 굴포 문화에 관한 그 후 소식 고고민속 1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학원 1965 잡지
도유호 로동신문-우리 나라 구석기 시대 연구를 위하여 1966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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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고종석, 『히스토리아』, 마음산책, 2003.
유용욱, 「<서평> 한국 고고학의 발생과 그 해석에 대한 인물사적 성찰」, 『한국구석기학보』 39, 한국구석기학회, 2019.
李光麟, 「北韓의 考古學 : 특히 도유호의 연구를 중심으로」, 『동아 연구』, 20,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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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균, 「도유호와 한흥수: 그들의 행적과 학술 논쟁(1948~1950)」, 『한국고고학보』 87, 한국고고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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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평양에서 러시아어로 나오는 잡지 <새조선> 1966년 9월호에 실린 도유호의 사진. <고송무 씨 제공>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유호
  3. 강만길・성대경 엮음, 1996, 『한국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
  4. (『동아일보』 1923년 5월 27일 8면, 「當選新時 가을저녁 咸興 都定浩」. 이 시는 都宥浩, 「시인 「꾀테」의 舊家를 찾고, 獨逸留學日記」(『東光』 26, 1931.10.4.)에 제목 없이 실려 있다.
  5. 한창균, 『한국 고고학 첫 세대 하담 도유호』, 혜담, 2017, 33쪽. 경성고등상업학교는 3년제였기 때문에, 휴학 기간을 포함하여, 그가 1928년 3월에 졸업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의 「이력서」에는 졸업 연도가 1929년 3월로 기재되어 있는데, 기록상의 착오로 추정된다.
  6. 도유호, 「구주행 인도양 건너서서(11), 『동아일보』 1930년 9월 16일; 도유호, 「감상(상) 감사와 정정」, 『조선일보』 1940년 4월 24일 참조.
  7. 한창균, 『한국 고고학 첫 세대 하담 도유호』, 혜담, 2017, 34쪽.
  8. 한창균, 「도유호와 한흥수: 그들의 행적과 학술논쟁(1948~1950)」, 『한국고고학보』 87, 2013, 76~117쪽.
  9. 도유호, 「民族問題에 關하야」, 『동광』 30, 1932.1., 102쪽.
  10. 『동아일보』 1940년 1월 28일
  11. 한창균, 「도유호와 한흥수: 그들의 행적과 학술논쟁(1948~1950)」, 『한국고고학보』 87, 2013, 76~117쪽.
  12. 도유호, 「感想 (上) 感謝와 訂正」, 『조선일보』 1940.4.24.
  13. Cyong-Ho Do, 1935, Probleme der koreanischen Geschichte in kulturellem Zusammenhang, Doctoral dissertation, Universität Wien.
  14. 도유호, 「感想 (中) 感謝와 訂正」, 『조선일보』 1940.4.25.
  15. 『동아일보』 1940.1.28. 참조.
  16. Library services from www.univie.ac.at 참조
  17. 『동아일보』 1940.1.20. 참조.
  18.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一)」, 『진단학보』 12, 1940, 160-201;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二)」, 『진단학보』 13, 1941, 110-145;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三)」, 『진단학보』 14, 1941, 149-191.
  19. 도유호, 「中國都市文化의 起源(一)」, 『진단학보』 12, 1941
  20. 김재원, 「賀書」, 『李丙燾博士九旬紀念韓國史學論叢』, 두계이병도박사구순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지식산업사, 1987
  21. 「會員消息」, 『진단학보』 14, 1941, 192쪽.
  22. 이광린, 「北韓의 考古學. 특히 都宥浩의 硏究를 中心으로」, 『동아연구』 20, 1990, 105-136쪽,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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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建準, 第1回 委員會 開催를 위한 招請狀 發送(135人)」, 『매일신보』 1945.9.1.
  25. 심지연, 1991, 『人民黨硏究』,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경남대학교출판부.
  26. 김기석, 「김일성종합대학의 창설에 관한 연구」, 『북한의 교육과 과학기술』, 경인문화사, 2006, 45-87쪽..
  27. 한길언, 「金日成綜合大學歷史博物館」, 『문화유물』 2, 1950, 65-73쪽.
  28. 「조선물질문화유물조사보존위원회 임명에 관하여」(내각지시 제49호, 1948년 11월 5일); 「조선력사편찬위원회의 조직 및 기본과업에 관한 결정서(내각지시 제8호, 1949년 1월 14일).
  29. 도유호 1949
  30. 조운, 「農樂에 關하여(座談會)」, 『문화유물』 2, 1950, 41-51쪽.
  31. 이광린, 「北韓의 考古學, 특히 都宥浩의 硏究를 中心으로」, 『동아연구』 20, 1990, 105-136쪽,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32. 한창균, 「도유호와 한흥수 : 그들의 행적과 학술 논쟁(1948~1950)」, 『한국고고학보』 87, 한국고고학회, 2013.
  33. 한흥수, 「우리 민족의 명예를 위하야」, 『독립』 1948.2.18., 로스앤젤레스.
  34.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56-103, 1950.
  35. 한흥수, 「原始社會史硏究에 關한 覺書」, 『력사제문제』 2, 1948, 117-132쪽.
  36.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1950, 22-45쪽.
  37. 한흥수, 「原始社會史硏究에 關한 覺書」, 『력사제문제』 2, 1948, 117-132쪽.
  38.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1950, 22-45쪽.
  39. 한흥수, 「原始社會史硏究에 關한 覺書」, 『력사제문제』 2, 1948, 117-132쪽.
  40.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
  41.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
  42. 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1950, 4-55쪽.
  43.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
  44. 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1950, 4-55쪽.
  45.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上)」, 『력사제문제』 15, 1950, 56-103쪽.
  46. 한흥수, 「朝鮮原始史硏究에 關한 考古學上諸問題」, 『력사제문제』 15, 4-55.
  47. 도유호, 「先史學의 唯物史觀的 考察을 爲한 몇개의 基本問題(下)」, 『력사제문제』 16, 1950, 22-45쪽.
  48. 김광진, 「조선에 있어서의 봉건제도의 발생(상)」, 『력사과학』 1955-8, 1955, 11~39쪽.
  49. 도유호, 「조선 력사상에는 과연 노예 사회는 없었는가 –김광진 동지의 부정론과 관련하여-」, 『력사과학』, 1956, 315~377쪽.
  50. 김광진, 「삼국 시대의 사회–경제 구성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상)」, 『력사과학』 1956-5, 14쪽.
  51. 김석형, 「조선 력사 연구의 기초 축성을 위하여」, 『력사과학』 1957-3, 9쪽.
  52. 림건상, 「김석형 동지의 론문 《3국의 계급 제 관계》에서 제기된 몇 가지 리론상 문제에 대한 의견」, 『력사과학』 1960-1, 107~119쪽; 김석형, 「조선 고대사 연구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리론상 문제」, 『력사과학』, 1960-3, 82~85쪽.
  5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유호
  54. 도유호, 『조선원시고고학』.
  55. 이기성, 「북한 청동기시대 고고학 연구 경향의 변호와 쟁점」, 『문화재』 53-3, 2020, 184~201쪽.
  56. 도유호, 「安岳의 高句麗 壁畫墳」, 『자연과학』 5, 1949, 29~37쪽.
  57. 채희국,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기원에 대하여」, 『문화유산』 3, 1959, 5~28쪽.
  58. 도유호, 「고구려 석실 봉토분의 유래와 서역 문화의 영향」, 『문화유산』 4, 1959, 29~37쪽.1959.
  59. 력사연구소, 1961, 「우리 당 제4차 대회가 제시한 과업 수행을 위한 력사학계 임무, 『력사과학』 1961-6, 1~7쪽.1.
  60. 주영헌, 「고구려 봉토 무덤의 기원과 그 변천」, 『고고민속』 3, 7~18, 1963.
  61. 강현숙, 「북한의 고구려 고고학 조사·연구의 성과 과제」, 『문화재』 53-1, 2020, 106~125쪽.
  62. 전주농, 「고구려 벽화 무덤의 시원에 대하여」, 『고고민속』 3, 1964, 57~61; 한창균, 『하담 도유호: 한국 고고학 첫 세대』, 혜안,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