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석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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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충북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박수진(CBNU2024)가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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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담(全錫淡)
출처 :
 
한글명 전석담 한자명 全錫淡 영문명 Jun, Suk Dam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16년 몰년 미상년 출신지 20세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공 경제학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글상자| |내용= 전석담(全錫淡, 1916 황해 은율 ~ ?)은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경제학자, 사학자이다. 동국대학교 등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다 1946년 월북하였다.[1]

전석담(全錫淡, 1916~?)은 백남운에 비해 22세 젊은 새세대 식민지 조선의 맑스주의 사회경제사학자였다. 기존 연구에서 5단계설과 거리를 두는 그의 시대구분론은 독특하다고 평가되었다. 본고는 그의 학력을 통해 그 ‘유래’를 처음 밝혔다. 그는 경성제대 예과가 아닌 일본의 구제 고등학교를 거쳐 도호쿠제대 경제학과로 진학했다. 이 과의 확인된 조선인 졸업생은 그가 유일했다. 다만 1938년 ‘노농파교수그룹사건’으로 과 분위기가 엄혹해지자, 경성제대 대학원에 진학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스승 중 나카무라 키치지(中村吉治)는 호패제도와 오가작통을 중심으로 에도 막부 초기 농정사 및 농촌사회사를 연구했다. 우노 코조(宇野弘蔵)는 ‘관계로서의 후진(後進)’ 개념을 통해 ‘양극분해론’이란 일국적 방법론을 뛰어넘어 후발국인 일본 근대화 과정의 ‘모순’을 밝히려고 했다. 그 영향을 받아, 전석담은 조선초기 호패제도와 오가작통제 등이 농민을 옭아맨다고 했다. 또한 일본이 후발주자의 ‘모순’을 갖고 근대화했고, 조선은 식민지로서 자본주의적 신용법칙 안에 들어갔으나 산업구성상 ‘낙후’되었다고 보았다. 다만 도호쿠제대 스승들이 전석담의 연구에서 직접 인용되지 않은 것과, 그가 월북 후 그 전보다 식민지 조선의 ‘자본제적 성격’을 강조한 것은 해방 후 남북한의 학술장에 맞춘 방법론의 ‘원용’과정과 ‘각주의 정치학’을 의미한다.[2]


생애


출생부터 교수가 되기까지

1916년 황해도 은율에서 태어났다. 1940년 일본의 동북제국대학(도호쿠제국대학, 東北帝國大學)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에는 경성상업전문대학 경제학교수를 역임하였고, 동국대학교 등에서 조선경제사와 경제학사를 강의하였다. 1946년 월북 이후에는 조선공산당과 남조선로동당의 계통을 연구하였다. 김일성종합대학교수, 민경제대학 정치경제학부장, 중앙당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1957년에 인민경제대학 부교수가 되었고, 1961년 북한의 력사학연구소가 편찬한 《조선근대혁명운동사》 작업 과정에 성원으로서 동원되었다. 1961년 9월 27일에 개최된 력사가민족위원회 연차회의에서는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64년 10월 사회과학원 경제법학연구소 교수가 되었다.[3]



학문적 성취

1945년 해방공간에서는 한국사에 대한 재정립과 체계화가 필요하였다. 이에 전석담은 정력적으로 이 분야에 투신하였다. 조선조에서 일제강점기를 아울러 연구하였고, 대중적 사론도 썼다. 그는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사를 연구하여 조선에서의 자본주의적 관계를 규명하였으며, 조선민족의 내재적 발전을 확인하고자 했다. 그는 특히 조선왕조 봉건사회의 후진성과 양반층의 민중 착취로 인해, 일제의 침략이 없었더라도 조선왕조가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며 조선 민중의 힘으로 역사의 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것으로 봤다. 이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대항하는 방편이기도 했다.[4] 경제학자의 현실문제와 경제정책에 대한 참여가 시작되었다. 제2공화국 당시의 ‘산업개발계획시안’의 작성을 비롯하여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 화폐개혁·농지정책자문 등이 행해졌고, 경제개발계획이 시작되면서는 평가교수단 등과 같이 폭넓게 참여의 문이 열리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1년 대학 최초의 경제연구소가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설치되어 이듬해부터 우리 나라 대학 최초의 경제학 전문학술지 ≪경제논집≫이 계간으로 발간되기 시작한 점이다. 이것은 교수의 임무 가운데 하나인 학술연구 성과 발표의 기회가 제도적으로 마련된 시초의 계기라는 점에서 의의가 큰 것이었다. [5]


주요 저서


연구


봉건조선의 발전과정

통일신라/고려/조선시대는 한심한 시대였다. 지배계층이 서민과 노비계층을 착취해먹으면서도 경제력 즉 생산성의 발전은 거의 없었다. 신라에서 고려로, 고려에서 조선으로 나라가 바뀌어도 지배계층은 거의 그대로 유지됐다. 가장 악질은 농민의 고혈을 뽑아먹는 지방관리층이었다.

일부 지배계층이 백성들을 착취하는 구조인데도 불구하고 신라/고려/조선에서 외국처럼 민중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 수백년씩 부패하고 무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 유지됐던 이유는 중국이라는 수퍼파워 스폰서의 존재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몽골은 고려를 침공해 고려왕조의 항복을 받고, 이후 왕족의 든든한 스폰서 역할을 해준다. 자신들의 말을 잘 들으면 왕권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청나라도 마찬가지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해서 조선왕의 항복을 받은 후(병자호란) 이씨 가문의 스폰서가 되어준다. 조선땅의 지배계급은 천 년 넘게 이런 식으로 중국에 빌어붙었다. 그래서 부패하고 무능력한 절대왕권과 관료집단의 지배구조가 수백 년간 유지됐다.

조선의 지배계급에게는 백성 위에 군림하겠다는 생각만 있었을뿐, 국력을 키우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공업은 노예들이나 하는 걸로 여겼다. 상업은 원시적 물물교환 수준에 머물렀다. 조선시대 말기의 본질은 생산력의 증대가 없는 착취의 증대였다. 일찌감치 명치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로 이동한 일본에게 조선이 꿀꺽 먹힌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7]


봉건조선의 몰락과 식민지화

조선 말기, 참다참다 못해 백성들이 대규모로 봉기했다. 1894년의 갑오농민란(동학운동)이었다. 위대한 인민항쟁이었다. 그러나 실패했다. 실패의 이유는 전봉준 등 반란 지도부의 철학 부재였다. 그들은 먹고살기 힘들다는 울분 표출에 그쳤을 뿐, 새로운 시대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특히 농업이 곧 경제의 전부였던 시대에 농업의 기반인 토지배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청사진마저도 없었다.

혁명을 하겠다면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혁명 지도부는 비전이 있어야 한다. 동학군은 비전이 없었다. 전봉준의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했으나 그 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무엇을 말해야 할지도 몰랐다. 가만히 앉아 시간을 허비하다가 전력을 정비한 관군과 일본군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패배했다. 즉, 조선은 보수세력이나 개혁세력이나 새 시대를 책임질만한 역량이 부족한 사회였다. 누굴 탓하겠나. 조선의 마지막 왕 순종이 죽었을 때 장례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매웠다. 그러나 왕을 위해 혹은 왕조를 위해 슬퍼한 사람은 없었다. 아직 새 나라를 만들 준비가 안 됐는데 옛 나라가 사라져서 서글퍼했을 뿐이다. 이씨가문과 양반층을 끌어내리고 조선땅의 새 지배자가 된 일제는, 일본을 공업 생산기지로 만들고 조선을 후방 농업 생산기지로 만들고자 했다. 조선의 쌀 생산량이 늘어나고 일본으로의 농산물 수출(수탈이 아님)이 늘어난 것은 좋았는데, 일제 말기로 갈수록 자작농의 비율이 줄고 소작농의 비율이 늘어났으며(즉 부의 양극화가 심해졌으며) 공업 등 다른 산업을 제대로 육성하지 않았다는 게 문제다. 일제는 행정관료도 하급직만 조선인으로 뽑는 등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대우했다. 말로만 내선일체일뿐, 불평등 사회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는 경제가 전시체제로 변하면서 일제는 과거 조선시대의 민중 착취와 노예노동을 재현했다.

[8].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전석담 Institution: 동국대학교 A worksAt B
Person: 전석담 Article: 이조사회경제 A isWriterOf B
Person: 전석담 Institution: 동북제국대학 A graduates B
Event: 력사가민족위원회 위원 선 Person: 전석담 A isRelatedTo B
Event: 한국사에 대한 재정립과 체계화 Person: 전석담 A isRelatedTo B





Timeline


▶Timeline임베딩


Network Graph







참고자원


전석담 역사학의 숨은 ‘발원지’와 해방 전후 한국 사회경제사 인식 「[3]」, 『한국학술지인용색인』.

전석담online, 위키백과.

민중조선사, "[4]", 『네이버 블로그 - 인디지오』online, 작성일: 2020년 01월 26일.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