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화

DH Edu
CWS21KHU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25일 (금) 00:35 판 (개요)
이동: 둘러보기, 검색

이월화


배우



원본 출처:KMDb

개요

이월화(李月華, 본명 이정숙, 1904~1933)는 1920년대 조선 연극, 영화계의 문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23년 <카츄사> 등 토월회에서의 공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 후에 4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오양극단을 설립하기도 했지만 각종 염문설과 소문에 휩싸이며 드라마틱한 삶을 보내다가, 1933년 해외에 있던 중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했다.[1]

내용

필모그래피[2]

연극

극단 역할 입단연도 출연작(배역)
신극좌 배우 1920 -
여명극단 배우 1922 -
민중극단 배우 1922 <운명>(메리), <영겁의 처>(오르가)
토월회 배우 1923 <How He Lied to Her Husband/오로라>(오로라), <카츄사>(카츄사),
<하이텔베르히>(케티), <사랑과 죽음>(폴리아),
<산송장>(마샤), <카르멘>(카르멘) 등
오양가극단 창립자 1928(추정) -


영화

영화 제작사 개봉일 배역(이름)
월하의 맹서 조선총독부 1923 주연(정순)
해의 비곡 조선키네마 1924.11.12. 조연(1인2역)[3]
뿔빠진 황소 조선키네마 1927.11.02. 주연(은하) 혹은 조연(카페 여급)
지나 가의 비밀(흑진주) 대륙키네마 1928.05.25. 조연(주산월)


이월화의 정확한 출생일과 출생지는 알 수 없다. 일단 본적은 경성으로 되어 있으나,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기 때문에 양모의 손에 자랐다. 이월화는 처음에는 양모를 생모인 줄 알았다고 한다.[4] 그러나 이월화가 양모가 생모가 아님을 안 이후에도 지극히 모셨다는 점, 그리고 병든 어머니를 위해 타국에서 귀국하다가 죽음을 맞았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양모와의 사이는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5]
이월화는 윤백남의 신극좌와 민중극단을 통해 연극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토월회 2회 공연을 계기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의 인기가 아주 어마어마했는데, 신극 운동을 표방하며 기존에 없었던 무대장치와 음악, 소품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던 토월회의 무대예술과 함께 그동안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이월화의 연기가 큰 시너지를 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한 언급들은 다음과 같다.


Quote-left.png

이번 공연에는 "카주샤"와 "케데이"로 분장한 이월화 양이 전인기를 끌다시피 하였다. 여우로는 선천적 결점이 적지 아니하나(표정은 누구나 다 없었으니까) 말할 것이 못 되고 그중 <부활>에 옥중생활에 나타난 그의 예풍은 여간 소인배우로는 흉내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순결한 처녀다운 기분을 드러냄에는 전연 실패를 하였으나) 여하간 앞으로 공부가 있기를 바라며...[6]

Quote-right.png
출처: 심홍,「미래의 극단을 위하야」, 『동아일보』, 1923.10.07.


참고문헌

주석

  1. 아래의 논문에 나온 인물 생애를 요약.
    김남석, 「여배우 이월화 연구」, 『어문논집』50, 민족어문학회, 2004, 200-250쪽.
  2. 김남석의 위의 논문을 바탕으로 정리함. 연극과 영화 제목은 조선극장을 통해 보는 식민지 조선의 연극·영화계의 Nodes와 KMDb에서 가져옴.
  3. 극중 이월화가 맡은 두 인물의 관계는 모녀지간이다.
  4. 김수남, 조선영화 최초 여배우에 대한 논의」, 『영화연구』27, 영화연구, 2005, 57-88쪽.
  5. 김수남, 위의 논문, 2004
  6. 심홍,「미래의 극단을 위하야」, 『동아일보』, 1923.10.07. 5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기여

CWS21KHU: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