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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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G21KHU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25일 (금) 05:27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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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난영


엘레지의 여왕


이난영
<목포의 눈물> 가사지에 실린 이난영의 사진
본명 이옥례(李玉禮)
호적명 : 이옥순(李玉順)
예명 일본식 이름 오카 란코(岡 蘭子)
출생 1916년 6월 6일
일제 강점기 전라남도 목포
사망 1965년 4월 11일 (48세)
대한민국 서울
직업 가수, 前 연극배우
장르 트로트
활동 시기 1930년 ~ 1965년
배우자 김해송
가족 자녀는 4남 3녀
오빠 이봉룡(가수 겸 작곡가)
조카딸 이민자(가수)
종교 천주교(세례명: 마리아)


개요

엘레지[1]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난영은 1935년 9월 <목포의 눈물>을 통해 일제 시대 우리 대중음악의 전성기의 시작을 열었다고 평가받는다. 1965년 4월 49세로 세상을 떠났으나 일제 치하에서 늘 한복을 입고 생전에 1000여 곡 이상을 발표했던 일제 강점기라는 특수한 역사가 만들었던 불세출의 슈퍼스타로 그녀의 업적을 기려 1966년 목포에 그녀의 <목포의 눈물> 기념비가 세워지고 매년 '난영 가요제'가 열린다.[2]

내용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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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년 / 6월 6일 목포 양동 출생(본명은 옥례(玉醴)로 알려져 있으나 호 적에는 옥순(玉順))
  • 1923년 / 현 북교 초등학교(당시 목포 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 1929년 4학년 때, 학교 중퇴(자퇴 사유는 ‘거주지 이전’)
  • 1932년 / 목포에서 태양극장(단) 입단하여 무대 활동 시작
  • 1933년 / 9월, 태평 음반회사에서 <시드는 청춘>과 <지나간 옛 꿈>으로 데뷔, 같은 해 10월, 오케 음반회사에서 <향수>로 다시 데뷔.이때부터 1943년까지 오케 음반회사 전속 가수로 활동
  • 1935년 / <목포의 눈물> 발표, 잡지 <삼천리>에서 발표한 레코드 가수 인기투표에서 여자 가수 부문 3위에 선정
  • 1936년 /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 영화인 <노래 조선> 출연, 일본 테이치쿠 음반회사에서 오카란코(岡蘭子)라는 예명으로 <春の歓喜> (테이치쿠 50287), <別れの船歌>(테이치쿠 50344), <アリランの 唄>(테이치쿠 50344) 등을 발표
  • 1937년 / 11월 4일 김해송과 결혼(호적 기준)
  • 1939년 / 조선악극단 일원으로 일본에서 영화, <思ひつき夫人>6)에 출연, 이화자 등과 함께 <아리랑> 등을 부름
  • 1939년 / 장세정 등과 저고리시스터로 활동
  • 1941년 / 오케 음반회사에서 표창장 수여 및 기념 공연 개최 1943년 도쿄 영친왕 저택에서 조선악극단원들과 공연
  • 1944년 / 약초가극단 일원으로 만주 순회공연
  • 1945년 / 만타악극대를 거쳐 K.P.K악단에서 주연으로 활동 시작
  • 1948년 / 김해송의 여자 문제에 상심, 춘천 소양강에서 자살 기도
  • 1950년 / 서울 수복 이후에 김해송 납북 및 사망, 어머니 박소아 사망
  • 1951년 / K.P.K 악단과 현대가극단 등에 출연.
  • 1952년 / 백조가극단 공연에 특별 출연
  • 1953년 / K.P.K 악단 후신으로 ‘이난영 악단’ 운영
  • 1955년 / ‘이난영 악단’ 해산
  • 1957년 / 동료가수 남인수와 본격적으로 친해짐
  • 1958년 / 12월에 김시스터즈가 일본으로 갔다가 1959년 1월에 미국 도착.
  • 1959년 / 이난영의 아들들로 구성된 김브라더즈 데뷔, 문화영화 <흘러간 옛 노래> 출연
  • 1961년 / LKL레코드에서 다수의 SP 음반과 독집 LP 음반 재 취입 1962년 남인수 사망 후, 김시스터즈 초청으로 미국행
  • 1963년 / 김시스터즈와 함께 자선 공연, 시카고와 하와이 공연 등을 거친 후 귀국
  • 1964년 / 이난영의 일생을 극화한 영화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아> 제작 1965년 시공관에서 마지막 공연
  • 1965년 / 4월 11일 이난영 타계
  • 1969년 / <목포의 눈물> 노래비 설립, 영화 <이 강산 낙화유수>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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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이난영을 둘러싼 이야기들

등단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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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인터넷 등에서 이난영의 등단 곡을 <불사조>로 언급한 것 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1933년 11월에 발매된 <불사조>가 이난영의 첫번째 흥행 성공 노래는 맞으나 등단 곡은 아니다. 이난영의 등단 곡은 1933년 9월에 태평 음반회사에서 발매된 <시드는 청춘>과 <지나 간 옛꿈>을 들 수 있다. 그리고 1933년 10월에 오케 음반회사에서 발매 된 <향수>도 오케 음반회사의 입사곡이자 등단 곡으로 언급할 수 있다. 태평 음반회사와 오케 음반회사의 등단 곡을 모두 언급하는 이유는 이난영의 전속계약 문제와 관련이 있다. 전속가수제도때문에 당시의 가수들은 여러 음반 회사에서 동시에 활동할 수 없었다. 이난영은 처음에 태양극단에서 막간 가수로 활동했고 태평 음반회사에서 노래를 녹음하였다. 하지만 이난영의 노래를 들은 오케 음반회사의 이철은 그 녀가 태평 음반회사와 정식으로 전속 계약을 맺기 전에 그녀를 오케 음반회사로 데려오려고 변장을 시키고, 태평 음반회사 사람들과 자동차 추격전을 벌이는 등의 암투를 벌였다.[3] 결국 이난영은 오케 음반회사 와 전속계약을 맺었고 그 이후로 그녀는 거의 모든 노래를 오케 음반회사에서 발매했다.
그런데 이난영이 1930년대에 회견한 내용에 따르면, 이난영이 태양 극단의 일원으로 일본 오사카(大阪)에 갔을 때,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말과 병원비가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태평 음반 회사에서 <도라지 도라지>라는 제목의 ‘도라지 타령’을 취입해서 한동안 그 노래가 일본 오사카에서 유행했다고 한다. 팔린 성적도 좋았으나 태평 음반회사에서 돈을 주지 않았고 결국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마저 들어서 가슴이 아팠다고 밝혔던 것이다.[4] 하지만 현재로서는 이난영이 불렀다는 <도라지 도라지> 음반을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이난영이 오케 음반회사에서 1934년에 <도라지 타령>을, 1936년에 <또 도라지>라는 노래를 발표하긴 했다. 그러나 그녀가 정식으로 등단하기 전에 불렀다는 <도라지 도라지>는 아직까지 찾을 수 없으므로 현재까지는 <시드는 청춘><향수>를 이난영의 등단 곡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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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유정, ⌜행(幸)과 불행(不幸)으로 보는 가수 이난영의 삶과 노래⌟,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3집,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16


참고문헌

이난영, 위키백과

주석

  1. "엘레지",『두산백과』online, 두산백과. 온라인 참조: "엘레지",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네이버.
  2. 이영준, ⌜한국가요사 이야기⌟, 아름출판사, 1994년, p450
  3. 이난영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오케 회사와 태평회사의 암투는 ⌜레코드의 열광시대⌟, 『별건곤』 1933년 11월호에 상세하게 소개되었다.
  4. 여산,⌜인기가수의 예술・사생활・연애-화발풍다우의 이난영 양⌟, 『삼천리』, 삼천리사, 1935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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