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화
개요
이월화(李月華, 본명 이정숙, 1904~1933)는 1920년대 조선 연극, 영화계의 문제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1923년 <카츄사> 등 토월회에서의 공연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 후에 4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오양극단을 설립하기도 했지만 각종 염문설과 소문에 휩싸이며 드라마틱한 삶을 보내다가, 1933년 해외에 있던 중 어머니가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로 돌아오는 길에 사망했다.[1]
내용
필모그래피[2]
연극
극단 | 역할 | 입단연도 | 출연작(배역) |
---|---|---|---|
신극좌 | 배우 | 1920 | - |
여명극단 | 배우 | 1922 | - |
민중극단 | 배우 | 1922 | <운명>(메리), <영겁의 처>(오르가) |
토월회 | 배우 | 1923 | <How He Lied to Her Husband/오로라>(오로라), <카츄사>(카츄사), <하이텔베르히>(케티), <사랑과 죽음>(폴리아), <산송장>(마샤), <카르멘>(카르멘) 등 |
오양가극단 | 창립자 | 1928(추정) | - |
영화
영화 | 제작사 | 개봉일 | 배역(이름) |
---|---|---|---|
월하의 맹서 | 조선총독부 | 1923 | 주연(정순) |
해의 비곡 | 조선키네마 | 1924.11.12. | 조연(1인2역)[3] |
뿔빠진 황소 | 조선키네마 | 1927.11.02. | 주연(은하) 혹은 조연(카페 여급) |
지나 가의 비밀(흑진주) | 대륙키네마 | 1928.05.25. | 조연(주산월) |
생애
이월화의 정확한 출생일과 출생지는 알 수 없다. 일단 본적은 경성으로 되어 있으나, 태어날 때부터 고아였기 때문에 양모의 손에 자랐다. 이월화는 처음에는 양모를 생모인 줄 알았다고 한다.[4] 그러나 이월화가 양모가 생모가 아님을 안 이후에도 지극히 모셨다는 점, 그리고 병든 어머니를 위해 타국에서 귀국하다가 죽음을 맞았다는 점을 미루어 보아 양모와의 사이는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5]
이월화는 윤백남의 신극좌와 민중극단을 통해 연극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토월회 2회 공연을 계기로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의 인기가 아주 어마어마했는데, 신극 운동을 표방하며 기존에 없었던 무대장치와 음악, 소품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았던 토월회의 무대예술과 함께 그동안 연극계에서 잔뼈가 굵었던 이월화의 연기가 큰 시너지를 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한 언급들은 다음과 같다.
이번 공연에는 "카주샤"와 "케데이"로 분장한 이월화 양이 전인기를 끌다시피 하였다. 여우로는 선천적 결점이 적지 아니하나(표정은 누구나 다 없었으니까) 말할 것이 못 되고 그중 <부활>에 옥중생활에 나타난 그의 예풍은 여간 소인배우로는 흉내도 내기 어려울 것이다. (순결한 처녀다운 기분을 드러냄에는 전연 실패를 하였으나) 여하간 앞으로 공부가 있기를 바라며...[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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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심홍,「미래의 극단을 위하야」, 『동아일보』, 1923.10.07. |
이월화 양! 조선의 유일한 여배우요 예원(藝苑)의 여왕인 이월화 양! 만일 조선에 비록 형태만이라도 극단이 있다 하면 이 이월화 양을 빼놓으면 그는 건조무미하고 살풍경한 사막이 되고 말 것이다. 천여 관중의 시선을 한몸에 모으고 무대에 올라서서 섬세하게 기예를 아로새겨 가는 것을 볼 때에 누구나 이러한 감상을 아니 느낄 자가 있으랴? 그의 일거수일투족에는 반드시 천재의 번뜩임을 볼 수가 있고 그의 울고 웃는 데는 관중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러주는 굳센 힘이 있다.[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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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선극단의 꽃 토월회극단의 이월화양, 과거에는 험로도 많고 눈물어린 애화도 있다」, 『매일신보』, 1924.03.18. |
이월화를 '예원의 여왕'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당시 이월화의 연기에 대한 평가가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월화는 이 연극들을 발판으로 토월회는 물론이거니와 조선 연극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배우가 되었다.[8]
그러나 이월화의 영화 연기는 연극 연기에 비해 다소 아쉬운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토월회에서의 성공 이후 각종 염문설에 휘말리고 자기 관리에 실패하면서 연기력이 더 성장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월화의 당시 기록에서 중요한 것은 숱한 남성들과의 연애 행각이다. 물론 연애 행각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박승희와의 연애 행각으로 인해 토월회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느슨해지고 결국에는 끊어지고 만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것은 그녀의 연기 인생에 큰 타격을 가져왔다. 이후 이월화는 지나친 음주와 남성 편력으로 방탕한 생활에 빠진 듯 하다. 여러 논자들이 조금씩 다른 주장을 하고 있지만 이월화의 생활이 방탕해지면서 배우의 본분을 잃게 된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로 인해 그녀는 새로운 연극을 접하고 연기력을 확충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 연극 배우로서 더 이상 성장할 수 있는 무대를 잃게 된 것이다.[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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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남석, 「여배우 이월화 연구」, 2004. |
토월회와의 사이가 멀어진 뒤 이월화는 몇 편의 영화에서 조연을 전전하다 세간의 관심 밖으로 나며 소식이 드물어지게 된다. 그의 그 이후 행보는 확실하지 않으나, 소인극 운동과 같은 연극 활동을 하기도 하고, 상해를 오가며 댄서 생활을 하기도 한다. 1928년 1월 5일자 『조선일보』의 기사[10]를 보면, 그가 상해로 건너간 시기에 이씨 성의 남자와 결혼했으며, 조선에 돌아온 뒤에 생활고를 이겨내기 위해 기생 생활을 하고 있음을 전달하고 있다.
이월화의 마지막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 상해에 있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하다가 일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는 것인데, 어떤 기록에서는 관부연락선에서 대한해협에 몸을 던졌다고 말하기도 하고, 음독자살을 했다는 설도 있다.[11]
이월화는 연극사적 위치와 관련해서 김남석은 신파 극단의 구찌다데[12]식 연기를 하다가 신극의 대본 위주의 연기로 전환한 최초의 배우이자 최초로 스타덤에 올라 만인의 사랑을 받은 여배우, 우리나라 최초 극영화에 출연한 여배우로서의 의의를 제시하는 한편, 과도기적 인물로서 새로운 시대의 연기에 대한 이해도와 연기에 대한 신념이 부족했던 것을 한계로 짚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그의 삶을 둘러싼 다양한 소문과 루머들은 이월화가 그만큼 주목을 받은 배우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월화를 조선 최초의 소위 "스타" 여배우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본다.
참고문헌
주석
- ↑ 아래의 논문에 나온 인물 생애를 요약.
김남석, 「여배우 이월화 연구」, 『어문논집』50, 민족어문학회, 2004, 200-250쪽. - ↑ 김남석의 위의 논문을 바탕으로 정리함. 연극과 영화 제목은 조선극장을 통해 보는 식민지 조선의 연극·영화계의 Nodes와 KMDb에서 가져옴.
- ↑ 극중 이월화가 맡은 두 인물의 관계는 모녀지간이다.
- ↑ 김수남, 조선영화 최초 여배우에 대한 논의」, 『영화연구』27, 영화연구, 2005, 57-88쪽.
- ↑ 김수남, 위의 논문, 2004
- ↑ 심홍,「미래의 극단을 위하야」, 『동아일보』, 1923.10.07. 5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조선극단의 꽃 토월회극단의 이월화양, 과거에는 험로도 많고 눈물어린 애화도 있다」, 『매일신보』, 1924.03.18. 3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 국립중앙도서관. - ↑ 김남석, 위의 논문, 2004.
- ↑ 김남석, 위의 논문.
- ↑ 「일시소문놉든여성의최근소식 4 말성만튼여배우이월화 극단떠나서기생생활」, 『조선일보』, 1928.01.05. 2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김남석, 위의 논문, 2004.
- ↑ 맥락만 이해한 채 즉흥적으로 연기하는 것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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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WS21KHU: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