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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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WS21KHU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6월 22일 (화) 21:36 판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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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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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1915년 시마무라 호게츠(島村抱月)의 동경 예술좌가 내한하여 <카츄사>를 공연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이를 따라 신파극단 예성좌가 바로 다음해에 <카츄샤>를 공연함으로써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그리고 1923년에는 신극 공연을 표방한 토월회에 의해 공연되면서 이후 한국 연극의 대표적인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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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수진, 「카츄샤 이야기<부활>의 대중서사와 그 문화 변용」, 2014.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은 조선 연극, 영화계의 단골 스토리였다. 특히나 1915년 예성좌의 연극을 시작으로 연극계에서 다양하게 재창작되었다. 카츄사의 이야기는 애정극, 가족신파극의 내용으로 각색되어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런 맥락에서 토월회에서도 <카츄사>를 공연했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

우선 조선극장을 통해 보는 식민지 조선의 연극·영화계 연구에서 등장하는 카츄사의 공연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날짜 연극 제목 공연 제목
1923.09.15. 카추샤 토월회 2회 공연[2]
1929.12.13. 카추샤[3] -

1923년 <토월회2회공연>의 상연 목록에 포함되어 있으며, 1929년 공연 때는 <카츄사>만 단독 공연되었다. 그러나 당시 기사에서도 '토월회의『카추—사』는이미세상에 정평이잇는 연극'[4]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조선극장 외의 무대나 명확히 기록되지는 않은 <카츄사>의 상연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우수진은 2013년[5]과 2014년[6]의 연구에 걸쳐 <카츄사>의 인기 요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참고문헌

주석

  1. 우수진, 「카츄샤 이야기<부활>의 대중서사와 그 문화 변용」, 『한국학연구』32,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03, 209~241쪽.
  2. 관련 기사
    土月會二囘劇」, 『조선일보』, 1923.09.10.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土月會 二回公演凖備」, 『동아일보』, 1923.09.11.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2회 공연에 분망, 토월회, 15일부터 조선극장에」, 『매일신보』, 1923.09.13. 3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국립중앙도서관.
    土月會의二回公演」, 『조선일보』, 1923.09.14.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土月會劇온延期오는십팔일로」, 『조선일보』, 1923.09.16.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土月會公演은今日」, 『동아일보』, 1923.09.18.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演劇과 活動」, 『조선일보』, 1923.09.22. 조선일보 3면, 『조선뉴스라이브러리』online, 조선일보.
  3. 土月會에서 카주샤上演」, 『조선일보』, 1929년.12월.13일. 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4. 土月會에서 카주샤上演」, 『조선일보』, 1929년.12월.13일. 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5. 우수진, 「무대에 선 카츄샤와 번역극의 등장-<부활> 연극의 수용 경로와 그 문화 계보학」, 『한국근대문학연구』28, 한국근대문학회, 2013.10, 403~437쪽.
  6. 우수진, 「카츄샤 이야기<부활>의 대중서사와 그 문화 변용」, 『한국학연구』32,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4.03, 209~24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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