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희
개요
박승희의 신극 운동 의의에 대한 문서입니다.
내용
박승희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토월회의 실패의 원인을 박승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를 박승희 혼자만의 책임으로 돌리기에 당대 식민지 조선의 상황은 너무나 좋지 않았다. 토월회라는 이름을 갖고 활동했다고 볼 수 있는 1923년 ~ 1931년은 다른 식민지 시기에 비해서 일본 당국의 검열과 탄압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든 공연의 상연은 일본 당국의 승인 하에 이루어져야 했고,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면 상연을 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대 연극계는 기반이 약했다. 박승희 본인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것처럼, 토월회는 시작부터 자본, 인물, 각본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 동인제로 시작한 만큼, 다양한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인물들은 있었지만, 연극에서의 핵심적 역할을 맡을 인물은 없었다. 연극 상연의 기본은 각본,무대, 그리고 배우이다. (자본의 문제는 세 문제의 근본이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무대와 배우의 문제에 자본 문제가 가장 크게 작용한다.) 토월회는 시작부터 위태로웠고, 이는 비단 토월회만 안고 있었던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대 식민지 조선에는 다양한 극단이 있었는데, 공연조차 올리지 못한 극단들도 존재했던 것으로 파악이 된다. (박승희의 토월회에 반발하여 탈퇴한 토월회 단원들이 결성한 백조회를 예시로 들 수 있다.) 그 극단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 또한 각본, 무대, 배우였다. (그리고 이는 현대 한국 극단에도 해당되는 문제이다. 전문 극단의 필연적 숙명과 같은 문제이기도 하다.)
더불어 가장 근본적인 자본의 문제는 그들의 신분 문제로 해결되기 쉽지 않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토월회는 동경 유학생의 동인제로 시작한 단체이다. 토월회가 창립되었을 당시, 그들은 학생 신분이었다. 학생 신분의 예술인들에게 연극 상연을 목적으로 거금을 투자할 (좋은 말로 투자이지, 사실상 기부 행위) 이는 없었다. 박승희도 이에 대해, 지위(地位)도업고명망(名望)도업고학생(學生)인우리를밋고천원(千圓)이라는큰돈을줄이(理)가잇겟습니까? [2]라고 회고했을 정도이다.학생 신분의 한계는 자본 문제뿐만 아니라 '연극' 자체에도 영향을 주었다. 연극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당대 조선 관객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었다. "본선택의 불명보다도 출연인물의 무경험이 우리들의 첫 출발을 여지없이 짓밟고 말 엇스니 무대에나가기 전에는 소진장의와 같이 제법 말을 잘하던 사람들도 한번 무대에발을 올려 노키만 하면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한마디의 말을 하려도 이삼분식낑낑 매다가간신이 하기도 하고 평소에는 극본의 대사를 무슨 글이나 읽드시 술술나려 오이든 사람들도 한 번 무대에 출연케 만되면 벼란간에 장승과 같이 딱딱해저서 정신에 착각이 생기는 관계인지 출연중도에그대로 무대 뒤로 뛰 얻으러 와서 할 수 없이 연극도중에 막을 나리고 만 거짓말 같은 실태까지 발생한 까닭에 처음 날에는 동경유학생들이 한다니 대처 토월회라는 것이 어떠한 것인가?』라는 호기심에이끝리어 상당히많이 왔던 관중들도 그 이튿날 되는 제2일부터는 벌써그 영향이미치게 되어 아주 영성하기짝이 없는 것이 엇습니다." [3]박승희 본인의 입으로 언급한 것처럼,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만 공연에 오를 수는 없었다. 또한 유학생이라는 신분에 너무 취해, 당대 조선 관객들을 얕잡아 본 것 또한 문제였다.[4] 습작기를 제대로 거치지 않고 데뷔를 하고자 한 청년들의 한계를 처절하게 보여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토월회는 기존 한국의 극을 상연하는 극단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박승희는 일본 유학 시절 다양한 연극을 보면서 서양의 근대극을 조선에 도입하고자 했다. 한국 근대극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극예술연구회가 1931년 등장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박승희가 처절한 실패를 맞본 토월회 제1회 공연은 1923년이었다. 토월회 이전에 진지하게 근대극을 상연했던 극단은 협률사 정도로 파악되는데, 협률사는 사실상 대한제국 황실의 지원 하에 있었기에, 토월회와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가 없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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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주석
- ↑ 박승희, 「新劇運動七年 (五)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05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 조선일보. - ↑ 박승희, 「新劇運動七年 (五)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조선일보』, 1929년.11월.05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 조선일보. - ↑ 박승희, 「[https://newslibrary.chosun.com/view/article_view.html?id=317219291107e1052&set_date=19291107&page_no=5 新劇運動七年 (七) 【土月會의過去와現在를말함】
]」, 『조선일보』, 1929년.11월.07일. (0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 조선일보. - ↑ 본고는 박승희가 1929년 조선일보에 본인이 직접 기고한 글을 참고하며 작성했다. 다만, 박승희 본인이 작성한 글이기에 조금은 거리를 두며 봐야 할 필요가 있다. 해방 이후, 박승희는 토월회에 대한 회고록을 작성했는데, 1929년의 자의식 과잉과 자신감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토월회에 대한 허무와 아쉬움에 대해 말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필자의 기준으로, 1929년의 박승희는 매우 자의식 과잉적 측면을 보여주었고 그러기에 그의 글을 텍스트 그대로 읽지는 않았다.
- ↑ 김재석, 「「토월회」 연극의 근대성과 전근대성.」, 『한국극예술학회』 34, 2011, P.14.
기여
- LHR21KHU: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