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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8일 (일) 01:57 판 (열악했던 조선 영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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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극장을 통해 보는
식민지 조선의 연극·영화계


- 극단 토월회와 상영된 조선 영화를 중심으로 -




조선극장팀: CWS21KHU, KJG21KHU, LHR21KHU





연구 목적


1924.07.12. 매일신보 3면[1]



Quote-left.png

조선극장(朝鮮劇場)은 연극 공연을 겸한 '고급 영화상설관'을 표방하며 일제강점기 경성의 인사동에 개관한 극장이다. 당시 경성의 극장가는 일찍이 서양영화 상영관으로 명성이 높던 관철동의 우미관과 1918년 영화상설관으로 재개관한 수은동의 단성사가 조선인 관객 유치를 위해 경합 중이었다. 1922년 (11월) 가설극장으로 운영되던 연흥사 자리에 조선극장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북촌 일대의 조선인 영화상설관 시대가 개막된다.[2]

Quote-right.png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 극장문화』



일제강점기 조선의 영화와 연극에 대해 현재 연구가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해방 이후, 남북으로 분단이 되며 사상 문제로 일제강점기 영화와 연극 연구가 더욱 어려워졌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사상과 이념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오늘날도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 연극사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영화와 연극의 특성상, 오늘날 남아있는 당대 자료가 매우 제한적이고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한적으로나마 '조선극장'이라는 당대의 공간을 빌려 일제강점기 조선의 영화와 연극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자 했다. 현재 영화진흥위원회 산하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일제강점기 조선 영화를 복원 및 디지털 리스마스터링 작업을 진행 중이지만, 당대의 영화인들에 대한 자료는 파편적으로 남아 있다. 월북한 예술인의 경우 그 기록을 더욱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더불어 필름이 소실된 작품 또한 많기에 현대인들은 온전하게 당대의 조선 영화를 마주할 수 없다.
근대 조선 연극에 대한 연구는 영화보다도 더욱 미진한 상태이다. 무대라는 제한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상연이 되고 휘발이 되는 연극의 특성상, 당시 연극의 자세한 사정을 알 방법이 사실상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소실된 극본아 다수라는 사실 또한 이 문제를 더욱 비관적으로 느끼게 한다.
그러나 당대의 신문의 기사와 광고에 이에 대한 언급과 비평이 있기에 조금이나마 당대의 연극과 영화를 접할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과 같은 인터넷 시대의 현대인들은 극장에서 상영-상연되는 영화와 극에 대한 정보를 쉽게 확인할 수 있지만, 당대에는 신문과 광고지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근대 조선 연극과 영화에 대한 대한 학자들의 연구가 더욱 진행될 필요가 있지만, 지금 당장으로서는 그를 둘러싼 연구의 상황을 모두 알 수 없기에, 이에 대해 더 관심을 기울일 이들을 위한 DB를 구축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이기도 했다.
또한 조선극장에 대한 연구가 사실상 전무한 상태이기에, 조선극장을 바탕으로 일제강점기의 영화, 연극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후에 자료가 더 발굴이 되거나 복원이 된다면, 이를 바탕으로 더 많은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란다.
본 연구는 조선극장에서 상연된 조선 영화와, 조선극장에서 주로 공연을 올렸던 당대의 유명한 극단이면서, 한국 연극사의 한 획을 그은 토월회를 기반으로 진행하였다. 당대 어떤 이들이 영화와 연극 제작에 참여했는지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영화, 연극계의 상황에 대해 알아보고자 했다. 신문을 기반으로 연구를 진행하였기에, 불완전한 정보 또한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최대한 정확하고 객관적인 정보만 남기기 위해, 정보 자체나 그 출처가 불분명한 일부 예술인들과 작품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못했다는 점을 밝힌다. 이 연구 페이지, 혹은 출처가 되는 기사, 기록에도 남지 않은 예술인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연구 대상


본 연구는 조선극장이 개관되었던 1922년 11월부터 화재로 극장이 전소되어 폐관된 1936년 6월까지의 당대 신문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조선 영화(한국 영화)와 조선극장과 제휴를 맺고 공연을 올렸던, 조선 연극사에 한 획을 그은 극단 토월회의 공연을 중심으로 진행을 하였다. 조선영화의 경우, 식민지 조선에서 조선인 혹은 조선인 제작사가 제작한 영화를 포함해, 해외 동포들이 제작한 영화까지 포함을 했다. 식민지 상황에서 해외로 이주를 한 조선 동포들의 영화 또한 조선 영화로 분류했다. 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겠지만, 식민지 조선의 특수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 본 연구팀의 의견이다.
토월회의 경우, 조선극장에서 상연한 공연만 연구 대상에 포함했다. 1923년 설립된 토월회는 조선극장뿐만 아니라, 단성사, 우미관과 같은 경성의 극장을 포함해 전국순회공연을 진행했기에, 조선극장에서 상연한 연극만 본 연구 대상에 포함했다. 다만, 토월회 단원의 경우 조선극장 상연 공연뿐만 아니라 다른 극장에서 상연한 극의 배우와 단원들 또한 포함했다.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는 토월회 단원들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이 본 연구의 목적 중 하나이기에, 최대한 많은 토월회 단원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자 했다.


연구 방법


온톨로지(Ontology)


온톨로지 그래프(OntoGraph)

조선극장에서 상연된 연극, 상영된 영화, 해당 작품들과 관련된 인물/회사와 더불어 토월회의 구성원에 대해 자세히 볼 수 있는 온톨로지를 계획하고자 했다.




클래스(Class)

Time: 시간
Place: 공간
Person: 인물
Group1: 단체1
Group2: 단체2
Company: 회사
Part: 부서
Event: 사건
Movie: 영화
Play: 연극
Concert: 공연
Work: 작품
Press: 신문
Newspaper: 개별 신문
Article: 기사
Advertisement: 광고
Review: 감상평


릴레이션(Relation)

plays 상연하다 (Group2 - Concert/Play)
isPlayedAt 에서_상연되다 (Concert/Play - Place)
isPlayedOnv 에_상연되다 (Concert/Play - Time)
contains 을_포함하다 (Concert - Play)
isScreenedOn 에서_상영되다 (Movie - Place)
isReleasedOn 에_개봉되다 (Movie - Time)
actor 배우이다 (Person - Concert/Play/Movie)
directorv 감독이다 (Person - Concert/Play/Movie)
assistantDirector 조연출이다 (Part - Play)
danceDirector 안무이다 (Person - Play)
producer 제작자이다 (Person - Play)
writer 작가이다 (Person - Play/Movie/Work)
production 제작사이다 (Company - Play/Movie)
distribution 배급사이다 (Company - Movie)
original 원작이다 (Work - Play/Movie)
originalAuthor 원작자이다 (Person - Play/Movie)
leads 을_주도하다 (Person - Group1)
isMemberOf 구성원이다 (Person - Group1/Group2)
stageArtist 무대미술가이다 (Person - Group1)
isOccuredIn 에_일어나다 (Event - Time)
isOccuredAt 에서_일어나다 (Event - Place)
belongsTo 의_부분이다 (Part - Company)
isStaffOf 소속이다 (Person - Part)
hasPart 의_일부이다 (Group2 - Group2)
isEditionOf 간행본이다 (Newspaper - Press)
isContainedIn 에_게재되다 (Article/Advertisement/Review - Newspaper)
isPublishedIn 에_발행되다 (Newspaper - Time)
covers 다루다 (Article/Advertisement/Review - Concert/Play/Movie/Event)
mentions 언급하다 (Article/Advertisement/Review - Person/Concert/Play/Movie/Event)


속성(Attribute)

Person

성별: 성별
본명/이명: 본명 또는 다르게 불리는 이름
직업: 반드시 생업이 아니더라도 직업으로 분류될 수 있는 활동
토월회 관련: 인물이 토월회에서 수행했던 역할. 없을 경우 공란.
출신: 인물의 토월회를 제외한 소속 단체/회사, 혹은 경력
특이사항: 기타 주목할 만한 정보

Place

주소: 공간의 현대 주소
옛주소: 공간의 당대(1922~1936) 주소

Company

주소: 회사의 현대 주소
옛주소: 회사의 당대(1922~1936) 주소
전화번호: 회사의 당대(1922~1936) 전화번호




연구 데이터


【데이터 시트 페이지로 이동】



노드 데이터(총 592건)

  • Person 169건
  • Group 17건
  • Place 1건
  • Time 88건
  • Concert 7건
  • Play 30건
  • Movie 34건
  • Event 1건
  • Work 9건
  • Press 7건
  • Newspaper 104건
  • Article 85건
  • Advertisement 12건
  • Review 7건
  • Company 21건

링크 데이터(총 1,075건)

  • leads 7건
  • isMemberOf 131건
  • isStaffOf 4건
  • stageArtist 3건
  • actor 174건
  • director 38건
  • writer 46건
  • danceDirector 2건
  • producer 2건
  • production 35건
  • hasPart 8건
  • belongsTo 9건
  • plays 18건
  • assistantDirector 2건
  • isPlayedAt 18건
  • isPlayedOn 18건
  • contains 24건
  • isScreenedOn 34건
  • isReleasedOn 34건
  • isEditionOf 104건
  • isPublishedIn 104건
  • isContainedIn 104건
  • isOccuredAt 1건
  • isOccuredIn 1건
  • isSameAs 1건
  • covers 110건
  • mentions 34건
  • original 10건



시맨틱 네트워크(Semantic Network)

  • 2021.06.08. 버전




연구 결과


Timeline


  • 토월회의 공연과 조선 영화 중 신문과 같은 기록으로 상연일자와 개봉일자를 알 수 있는 작품들을 정리한 연보.[3]
  • 공연에 포함되어 있는 연극들은 모두 해당 공연 시작일을 기준으로 정리했다. '토월회n회공연'과 같이 공연에 큰 제목이 있을 경우, 공연에 포함되어 있는 연극들의 정확한 상연 일자는 기록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1924.06.04~1924.07.05.의 한 달 동안은 영화 상영 등의 극장 운영이 중단되고 무료 대여를 실시한 기간이었다. 토월회는 이 시기에 조선극장에서 1주년 공연을 진행했다.
  • 1934년 '활동사진취체규칙'[4]으로 인해 해외 영화 상영이 제한됨에 따라, 1934년 하반기를 전후하여 조선영화 상영 빈도가 상대적으로 촘촘해진 것을 볼 수 있다.
  • 1935년 최신식의 동양극장 설립 이후로 조선극장은 영화상설관으로 전환하게 된다.[5]

토월회의 배우 구성


  • 인물 속성에 직업이 배우로 드러나고, isMemberOf Link로 토월회와 연결된 배우들 중 활동 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인물만 분류하여 제작한 그래프
  • 토월회는 구성원의 변화가 빈번했기 때문에, 공연별로 구성원을 구분하기보다 연도를 기준으로 분류했다.
  • 파란색 원은 남성 배우, 빨간색 원은 여성 배우이며 검정색 원은 성별을 알 수 없는 배우들이다. (남:16, 여:17, 알수 없음:6)
  • 연도별로 토월회에서 연기했던 배우들과, 그 성비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 토월회와 관련된 인물들에 관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그래프가 토월회 배우 전체를 포함하고 있지는 않음을 밝힌다. 토월회 구성원으로 추정되지만 활동 시기가 불명확한 인물, 인물 정보에 배우 관련 활동이 있지만 토월회 내에서 배우로 활동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는 인물들은 제외되었다.
  • 그래프를 보면, 연도별 토월회와 여러 번 연결된 배우들, 즉 토월회에 오래 몸담았던 배우들보다는 일시적으로 토월회에 머물렀다 떠나간 배우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전체 39명 중 적어도 3년 이상 토월회에서 활동했던 배우는 7명밖에 되지 않는다. 또한 박승희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6]을 보면 그는 여성 배우의 부족이 토월회의 신극운동에 걸림돌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그래프에 제외된 배우들을 감안하더라도 토월회에 몸담았던 여성 배우는 상대적으로 보나 절대적으로 보나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즉, 당시 토월회는 배우 자체가 부족하기보단 한 번 합류한 배우들을 대부분 오래 품지 못했던 것이다.


배우의 직업들

배우 직업.png


  • 위의 파이 그래프는 Person 클래스의 직업 속성에 배우가 없는 인물들을 제외한 모든 노드들을 종합해 만든 파이 그래프이다.
  • 극단 토월회의 경우, 무용부, 미술부와 무대장치부에 속한 단원을 제외한 나머지 단원들은 배우로 볼 수 있기에, 특별한 언급이 없는 단원들은 배우로 포함시켰다.
    광고나 기사에 미술부, 무대장치부, 무용부에 속한 인물들에 대한 언급은 따로 있었기에, 그들을 제외한, 찾을 수 있는 단원들은 배우로 분류했다.
    물론 그러한 단원의 경우, 다른 작품 혹은 극단에서 행적을 찾기 힘들기에, 엄밀한 의미로는 배우로 보기 힘들 수도 있음은 유의해야 한다.
  • 총 136명의 인물 중 전업배우 72명, 겸업배우 38명, 알 수 없음 26명으로 비율은 그래프와 같다. 이 중 겸업으로는 감독, 배우로 2개, 여기에 제작/기획 또는 작가로 3-4개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고 최대 8개의 직업으로 수식되는 인물까지 있었으며 이름 외의 정보를 찾을 수 없는 경우를 알 수 없음으로 포함시켰다.
  • 그래프만 놓고 보면 전업배우의 비율이 50%이상으로 충분히 많은 듯 보인다. 그러나 그래프에는 작품 딱 하나 또는 비중과 관계없이 등장인물로 참여만 해도 KMDb에 배우로 올라와 있는 경우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을 직업배우라 보기 어렵고 이를 포함하지 않는다면 비율은 그만큼 낮아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료가 20년대-30년대 후반까지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철의 조선배우학교와 예술문화협회, 유치진의 연극학교, 이헌구의 연구생제도, 서항석의 예술학원, 김황섭의 문화학원 등 다양한 배우양성책들[7] 을 거치던 시기에 전업 배우가 늘어난 것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 데이터 분석결과와 같이 전업배우가 적고 겸업이 많았던 이유는 당대 문화예술계의 체계적인 시스템의 부족으로 인한 분업화의 부재라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당시 영화학교 논의에서는 해외 영화학교에 대한 소개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박을라의 <모스꾸바 영화학교 참관기>, 일본의 '영화배우학교', 미국의 영화 스타 양성에 대한 소식들과 소개는 체계적인 영화학교의 부재, 배우양성 부진 등 국내 영화계의 문제점을 외국의 성공적인 사례들을 통하여 극복하려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8]


조선 영화의 열악한 노동 환경

조선영화감독 분업 상황


  • 위 그래프는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조선 영화를 연출한 27명의 조선 영화감독을 바탕으로 한 통계 자료이다.
  • 당시 조선영화의 감독들은 위의 그래프가 보여주듯 한 명이 여러 작업을 수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 비슷한 시기의 미국이나 유럽은 그 당시 어느 정도 영화 제작의 분업화가 자리를 잡고 있던 반면에, 조선 영화계의 경우 분업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이나 유럽 영화에서 연출 감독이, 연출과 시나리오, 연출과 각색, 연출과 배우와 같은 역할을 수행한 경우도 있지만, 상업 영화에서는 연출 감독이 세 개 이상의 역할을 맡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찰리 채플린과 같은 천재적인 인물이 연출 및 영화 제작을 맡은 것이 아닌 한, 당대에도 현대와 유사한 분업화로 영화 제작을 진행했다.
    연출 감독이 세 개 이상의 역할을 맡은 것은, 현대에는 한국 독립 (단편)영화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경우인데,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영화들은 모두 수익을 목적으로 한 상업영화임을 고려하면 당시 조선 영화의 제작 환경이 열악했음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당대 식민지 조선 영화 시장에서나 상업 영화이지, 일본이나 서구권과 비교하면 상업 영화로 분류하기 힘든 지점 또한 다수 존재한다.
  • 연출 감독 이외의 스태프의 경우, 분업화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제작, 촬영, 편집, 조명, 편집 이외의 후반 작업 등의 분야에서 기본적인 제작 분업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 연구에서는 촬영 - 조명 감독과 프로듀서 등의 메인 스태프에 대한 자료를 포함하지 않았기에, 따로 정리 - 분석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사 반경에 포함된 조선 영화들의 경우, 촬영 - 조명과 후반 작업의 분업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세 작업은 전문성을 요구하는 파트이기에 영화의 퀄리티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파트이다. 후술하겠지만, 촬영 - 조명과 후반 작업 파트는 특히나 자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에,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자본력이나 기술력이 부족했던 당대 식민지 조선의 영화사들이 제작 분업화를 엄밀하게 하기엔 어려움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추가적으로 촬영 - 조명과 후반 작업의 세 분야는 연기나 연출에 비해 전문성이 낮게 평가되는 분위기 또한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분업화 문제는 현대 한국 독립 영화계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이다.


  • 위의 그래프는 앞서 언급된 조선영화와 그 감독, 배우, 작가들의 데이터를 시각화한 것이다. 작품을 중심으로 감독, 배우, 작가들이 연결되어 있다.
  • 파란색의 인물들 중 빨간색 원의 인물들은 한 번이라도 감독직을 수행했던 인물들이다.
  • 분홍색으로 따로 표시된 인물들은 토월회 관련 인물들이다.
  • 앞의 파이 그래프에서 보았듯, 다수의 감독들이 한 작품 안에서 두 가지 이상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경우는 감독이면서 동시에 시나리오 작가를 겸하고 있으며, 배우로 출연했던 경우도 다수 있다.


조선 배우계의 한계와 토월회의 한계

서연호,이상우(2000)에 따르면 우리 연극사에서 배우가 새로운 현실 인식과 언어 인식에 바탕을 두고, 삶의 문제를 작품의 주제로 삼아 합리적인 구조를 통해 사실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한 것은 1910년도 초부터이다.[9] 이어서 이때부터 고사성어와 고전표현이 들어간 재담극은 일상 대화가 중심이 된 대사극으로 변화되었고, 현장을 중심으로 자유롭게 연행하던 놀이판은 작품 전체를 논리적으로 구성한 극중 장면으로 전환되었으며, 춤과 노래와 사설을 하면서 극중 인물 역할까지 해야 했던 연회자는 극중 인물 역할만을 실제처럼 재현하는 배역으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고 전한다.[10] 그러나 근대극을 향한 이러한 새로운 조짐으로 나아가기까지는 당시로서는 쉽지 않은 일인듯 했다. 여러 데이터를 수집한 결과 특히나 이 흐름에 '배우'라는 직업에 대한 인식은 무척 좋지 않아보였는데 아래 기사를 통해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Quote-left.png

그당시조선에는 아직하나도연극이업슬뿐아니라 소위지식게급이나 행세하는집자질로 연극을하든지 배우가되면 자기자신만망하는것이 아니라 일가문증이망하는것으로 아는 놀라운시대임에도 불구하고[11]

Quote-right.png
출처: 『조선일보』, 1938.01.03



Quote-left.png

이때는 조선에도 그전에업든소위 신파연극이라는것이 잇섯스나 조선의 신파연극이라는것은 일반이다아는바와가티 진고개에서일부내지인들이 정말배우도못되면서『시바이』[12]하는것을보고그냥 숭내낸것이 조선신파연극의시초이엿다[13]

Quote-right.png
출처: 『조선일보』, 1938.01.03.


1920년대 현철에 의해 설립된 조선 유일의 배우양성 전문기관은 1기생 배출에 그친 채 경영자인 현철과 학생들 간의 의견 차이로 인한 내부 분열이 원인이 되어 폐교되었고, 이후 1930년대에는 신극계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유치진, 이헌구, 서항석, 김황섭 등이 주장한 배우양성의 필요성, 배우양성론을 토대로 열악한 조선의 극계를 타개하고 발전을 기하려 하였으나 전문 교육기관의 설립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14] 또한 1930-40년대 특히 활발했던 영화학교의 논의들은 당시 학리적으로 영화를 연구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점, 배우를 직접체험하는 연극과 영화는 달리 필름에 영사된 장면을 관람하는 점, 해외 영화의 선호도가 더 높았던 점 등을 원인으로 영화배우 육성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활동이 더딘 것으로 보았다.[15]
그러나 후대로 갈 수록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상승함에 따라 배우양성이 보다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선진적인 해외 영화 학교, 영화배우 양성에 대한 소개로 우리의 영화계를 자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 긍정적 전망을 확인할 수 있었다.[16]

토월회의 한계

식민지 조선의 신극 운동의 선발대 역할을 한 토월회는 많은 의의를 갖고 있는 동시에 내적 한계가 많았다. 토월회는 사실상 박승희 단독으로 이끈 극단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박승희는 당대 기준으로도 파격적인 월급제로 토월회 운영을 시도했지만, 수익성 문제로 제대로 실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몇 차례의 파업이 있었고, 불만을 품은 배우들의 잦은 탈퇴가 있었다. 박승희는 여배우 구인난으로 토월회의 운영의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앞서 보았듯 토월회는 해체 상태인 1927년을 제외하고 남녀 주요 배우 성비의 심각한 불균형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극단 내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운영으로 토월회를 위기로 빠뜨린 장본인이 박승희 본인이었다. 제대로 된 연습을 진행하지 않고 극을 올리거나, 각본난을 핑계 삼아 같은 극을 계속 올리고 수익성 문제를 운운한 박승희 본인의 문제도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 당대 기준으로 유명 여배우인 이소연, 복혜숙, 석금성 등의 배우를 단원으로 보유했음에도, 신문을 통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한 것은 단장으로서 문제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박승희의 신극 운동은 조선 연극사에 많은 의의가 있지만, 본인의 문제로 더 나아가지 못했다는 지점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열악했던 조선 영화계

영화는 자본의 예술이다. 제작에 투자된 자본의 단위에 따라 작품성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물론, 한정된 자본과 기술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영화들을 우리는 접할 수 있지만, 그러한 경우는 흔치 않다. 영화 제작 과정인 프리프로덕션 (사전 제작 비용 - 시나리오 작업, 배우 섭외, 미술 및 세트 작업 등등), 프로덕션 (촬영-제작 진행비), 포스트-프로덕션 (후반 작업) 모두 제작비를 요구한다. 당대 할리우드와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 영화 제작사들은 현대와 유사한 수준의 프로덕션 진행을 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토키 영화(발성 영화)가 나타나면서, 이에 따른 제작 기술 또한 발전을 이루었다.
반면 식민지 조선은 한정된 자본과 기술로 영화 제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모두가 같은 위치에서 영화 제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 영화라고 해서, 모든 영화가 엄청난 자본과 최신 기술로 제작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영화사는 특히 프리 - 프로덕션 단계부터 검열을 의식한 작업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식민지 조선은 영화의 기본적 사유부터 형상화하기 힘들었다.
이렇듯 시작부터 꼬인 매듭은 제작을 진행하면서 더욱 꼬였다. 본 연구의 주제인 조선극장에서 상영된 조선영화와 동시대에 상영된, 아카데미 상을 수상한 미국 영화 <서부전선은 이상 없다.>는 각본, 연출, 편집, 촬영, 조명, 음향 등 모든 분야가 철저하게 분업화되었음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스태프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잘할 수 있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반면에 조선 영화는 앞서 언급했듯 분업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영화 감독은 예술인이기 이전에 노동자이다. 아무리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를 찍는다 해도, 영화 제작은 엄연한 노동이다. 연출, 각본, 편집, 출연 등을 모두 소화하는 것은 아무리 영화 감독이어도 가혹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대에도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는 영화 감독들을 우리는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안정적인 환경에서 제작이 진행되기에 가능한 일이다. 연출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감독이 연출 이외의 여러 역할까지 소화해야 했기에 영화의 예술적 완성도는 자연스럽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당대 식민지 조선의 영화에서 이처럼 분업화는 상상 속의 무언가였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분업화는 모두 자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조선 영화사들은 기본적으로 수많은 인력을 감당할 자본력이 없었다. 분업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가능성 또한 있지만,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이행하기엔 너무나 열악한 환경에 있었을 것이다. 한 명의 연출 감독이 각본을 쓰고, 연출을 하고, 제작에 관여를 하고, 편집을 하고, 출연을 한 것을 보면, 당대 조선 영화의 열악한 환경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조선 영화와 연극

물론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시작할 수 없다. 프랑스의 어느 유명한 영화감독이 말한 것처럼, 영화 감독은 가지고 있는 자원을 바탕으로 완성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자본이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사람이 없어서와 같은 핑계를 대기 시작하면 영화를 만들 수 없다. 다만, 식민지 조선의 영화 감독들은 영화 제작의 기본부터 시작할 수 없다. 일본의 검열에 의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연극계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와 연극은 철학의 예술이다. 물론, 자본주의로 인해 상업성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영화 - 연극의 현실도 존재하지만, 어찌했든 사유와 철학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영화-연극인데, 식민지 조선의 영화-연극인들은 그럴 수 없었다.
이처럼 일제강점기는 한국 예술사 중에서 가장 암울한 시기였다. 일제의 검열로 인해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불가능했다. 그러한 정치적 검열 속에 제한된 자본과 기술로 영화와 연극을 창작했을 당대의 열악한 상황을 가늠하기도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 조선인들은 제법 많은 수의 영화와 연극을 창작했다. 그들이 창작한 작품에 대해 현재 정확히 알 수 없는 것 또한 많으나, 그들이 어떠한 작품을 창작했고, 누가 창작했는지는 기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와 연극은 크레딧의 예술이다. 조선극장을 통해 이름만 떠다니는 연극이나 영화, 혹은 이름도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수많은 당대 예술인들을 일부나마 기록한 것이 이 연구의 의의라고 본다.


연구 후기



CWS21KHU 🤔 자료조사가 광산을 하염없이 캐는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가치가 될 만한 광물을 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열심히 자료를 모으고, 정리를 하고, 달려왔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는 것 같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 수업을 들으면서 평범한 돌멩이처럼 보이는 것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게 된 것 같다...



LHR21KHU 😊 영화를 만들 때 항상 느꼈던 것은 이론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이었는데, 이번 연구를 하면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학자들과 실제로 현장에서 작업한 예술인들의 견해는 같기 힘든데, 이로 인해 영화_연극사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진행이 될 수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와 연극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는 현장인데, 책상에만 앉아 있는 학자들이 전쟁터와 같은 현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물론 아닌 학자들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현장과 학계의 불협화음이 언젠가는 해결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어쩌면 제대로 건들 수 없는 연구는 건들지 않는 편도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서 끊임없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KJG21KHU 🤟🏻 어린시절 하는 공부가 머릿속 책장을 만드는 일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나에게 있어 이번 연구는 책장에 책을 꽂는 법을 배우는 일이었던 것 같다.

조 편성과 함께 주제가 정해지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할 때에는 모일수록 든든하다고 느꼈다. 이러한 생각은 언제 어디든 필요한 때가 생길 것이고, 넣으면 들어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서 비롯된 듯 한데 이러한 나의 기대와 달리 가닥이 잡히고 주제가 좁혀질수록 넘치는 자료들은 짐이 될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버리자니 아쉽고, 넣자니 말하고자 하는 바가 흐려지지만, 그래도 포기하기 어려운, 마치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맥시멀리스트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종종 생기곤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팀으로 진행하는 것은 내게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혼자서 결정하기 힘든 것들을 여러 시각에서 보고 고르며 덜고 넣어가니 나름의 질서를 갖추어 정리할 수 있었다. 또 의견을 나누어 방향을 잡고 결단을 내리고 나누어 일하는, ‘따로 또 같이’의 방식이 내 성향과 잘 맞기도 했고 현재 상황과 맞물려 최선의 방법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반면 품이 많이 들어간 탓인지 이런저런 사소한 아쉬움도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진 것 같다. 아쉬웠던 점은 사실 결국 필연적일 수밖에 없던 것들인데 그 중 하나로 주제를 잡을 때 조금 더 특정짓지 못했던 것이 있다. 얼마만큼의 자료가 존재하는지, 또 어떤 형태의 결과물로 완성될지 몰랐기에 초반에 주제를 넓게 잡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 좁아진 주제에 들어가지 않는 자료까지 모으게 되어 초반의 수고들 전부가 하나씩 의미가 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쉬웠다. 그리고 또 하나는 데이터를 수집하기 전에 합의해야 할 부분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몰라 각자의 루트로 모으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분석과 결론을 도출하기 쉽지 않았던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래도 수업, 연구, 아쉬움 모두 의미있는 시간을 보낸 것 같다. 하나의 데이터를 편찬하는 일이 가져야하는 과정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필요한 논의, 보기 좋게 가공하는 법, 툴, 해외 사례까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배웠고, 수강신청 할 때 ‘취업을 위해 도움이 되는 전공수업’이라는 그 때의 마음보다 과분한 것들을 얻어가게 되었다. 고생해준 조원들, 의견나누어준 학우들, 좋은 수업 만들어주신 교수님께 감사 전하며 후기를 마친다. 이번 학기가 끝나고 나면 혼자 멋지게 책장을 정리해 볼 셈이다.




코멘트


신여성팀

MHS21KHU 👍🏻 토월회를 중심으로 당대 조선의 영화계를 살펴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특히 복잡한 네트워크 그래프를 소그룹 단위로 나누어서 목적에 맞게 활용하신 점이 좋았습니다. 당대 시대에도 여전히 예술을 하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던 인물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 인상 깊은 발표였습니다.



AHJ21KHU 😊 영화는 자본의 예술이다...결국 돈이군요...씁쓸합니다. 자본 부족으로 인한 제작의 어려움..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물론 식민지 조선의 영화 감독들은 일본의 검열이라는 제약도 더해져 더욱 힘든 상황이었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들을 제작해낸 당시 사람들과, 그들을 기록해 기억한 조선극장팀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조원분들의 감상평을 보고 어떤 만화에서 봤던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돌멩이 사진을 보여주며 "너는 이 돌멩이 같다."라고 말씀하신 장면인데, 학생은 겨우 돌이라는 말에 분개하죠. 그러나 알고보니 그 돌은, 다이아몬드 원석이었습니다. 다이아몬드를 얻기 위해서는 섬세한, 불꽃 튀는 가공 작업이 필수죠. 조선극장팀은 돌멩이가 아니라, 돌멩이로 위장한 원석을 캐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원석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꼈던 깊은 고민이라는 가공 과정을 통해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내셨어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보여주신 것처럼 '돌멩이처럼 보이는 것들'을 다이아몬드로 만들어내는 것은 그것들을 가공해내는 우리들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디지털인문학이라는 학문이 참 매력적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다음 학기에도 디지털인문학 강의 콜??ㅎㅎ



LHY21KHU 🙏🏻 제가 지금 영화평론스터디에서 영화평론을 공부하고 있는데 고전 한국 영화들, 특히 식민지 시대에 제작된 영화에 대해서 공부하다보면 어떻게 이런 시대에서 영화라는 예술을 꽃피웠는지 궁금할 때가 많았습니다. 조선극장팀 연구 덕분에 그러한 의문이 해소될 수 있어서 보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독립팀

LSH21KHU 👍🏻 한국사를 공부할 때 잠깐 스쳐갔던 토월회에 대해서 이렇게 자세한 발표를 들을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개인적으로 독립팀 위키를 만들 때 조선극장 팀의 위키를 보며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요, 그만큼 모범적인 위키였다고 생각해요.



KYW21KHU 😊 제가 아는 조선극장은 수박 겉의 절반도 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배우의 구성부터 배우들의 직업, 영화계의 열악한 노동 환경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한 주제와 결과들에 정말 흥미롭게 페이지를 읽어나갔던 것 같습니다. 독립팀 위키를 만들어나가며 한 번씩 보고 동기부여를 받고 갔는데, 최종 페이지를 보니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연구 재미있게 잘 보고 갑니다:)



LZH21KHU 🙏🏻 조선극장 팀은 조선극장에서 상영되었던 조선 영화 특히 토월회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인데 이 연구를 통해 제가 외국학생으로서 조선극장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매우 신선한 주제이며 재미있어요!


모던팀

CSH21KHU 👍🏻 위키를 보면서, 전문적인 서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있었던 영화와 연극에 종사하던 배우들과 이들이 만든 조직들을 알 수 있었고, 정말 방대한 내용을 잘 정리해 위키를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KGR21KHU 😊 교수님이 말씀하셨듯 아카이빙 작업부터가 큰 의미를 가질 수 있었던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언어적인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고 자료를 찾는 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그러한 작업을 학기내 꾸준히 쌓아주셔서 어디서도 쉽게 접하지 못했던 자료를 이 기회에 접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작업 자체는 물론 이 작업을 활용한 다른 연구들도 기대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KSH21KHU 🙏🏻 조선극장 팀의 위키를 보고 발표를 들으면서, 조원분들께서 이 연구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열심히 하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해당 위키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유용한 정보를 얻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영화와 연극에 대한 연구들이 많이 부족한 상황 속에서 이 정도 결과물을 내신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저같은 벼락치기 인간은 불가능했을것같네요..)


경성팀

PHS21KHU 👍🏻 조선극장 팀이 얼마나 공을 들여 작성했는지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체계적으로 분류된 자료들 덕분에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처럼 이후 연구자들의 큰 보탬이 될 발표였던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SYJ21KHU 😊 조선의 극장과 영화와 관련된 정보들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어 관련 연구를 하시는 분들께 많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 또한 영화에 관심이 있는 편이라 주의 깊게 보았습니다. 본 자료를 기반으로 토월회에 관한 영화를 제작해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당시 영화 산업 노동 환경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사실도 예상은 했지만 꽤나 심한 것 같아 놀라웠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KM21KHU 🙏🏻 조선극장팀의 발표과 위키는 자료가 엄청 많은데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는 것이 놀랐습니다.그래프도 그냥 그래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설명도 잘 써주시고 모범적인 위키인 것 같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참고 자료


  1.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2.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3.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4. KMDb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
  5.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7.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주석


  1. 고급영화와 소녀가극단, 새 희망에 띄운 조선극장, 모든 환난에서 벗어나와 새로운 희망에 잠겨 있다」, 『매일신보』, 1924.07.12. 3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국립중앙도서관.
  2.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로 보는 일제강점기 극장문화』, 2020.12.15, 123쪽.
  3. 조선 영화 중 중국 영화사인 상해고성영편공사 제작의 <양자강>이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데, 신문 지면에는 '동포영화'로 표현되어 있다. 조선인 감독과 배우가 중국 영화사와 함께 제작한 영화로, 팀원 논의 끝에 조선 영화에 포함시켰다.
    조선에처음인 상해동포영화 양자강상영」, 『조선일보』, 1931년.05월.01일. 5면, 『조선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4. 관련 기사
    은막에도 통제령! 외국영화수입을 제한」, 『동아일보』, 1933.10.21. 2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영화통제규칙」, 『동아일보』, 1934.08.02. 2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국산영화상영과 양극전문극장측의 영향 그문에관객이적어질가하야 우려하는 경향현자」, 『매일신보』, 1934.08.29. 7면, 『대한민국신문아카이브』online, 국립중앙도서관.
    내구월부터 서양영화는 점축」, 『조선일보』, 1934.08.30. 3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네이버.
  5. 장한기, "조선극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1995년.
  6. 박승희, 「신극운동칠년 十 【토월회의과거와현재를말함】」, 『조선일보』, 1929.11.15. 5면, 『조선 뉴스 라이브러리 100』online, 조선일보.
  7. 윤금선, 2006, 「1920-40년대 배우양성론과 그 활동 양상-신문,잡지를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화』 제30집,
  8. 윤금선, 2006, 「1920-40년대 배우양성론과 그 활동 양상-신문,잡지를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화』 제30집,
  9. 서연호,이상우, 2000, 「우리 연극 100년」, 현암사,
  10. 서연호,이상우, 2000, 「우리 연극 100년」, 현암사,
  11. 배우학교창시자 칠전팔기!이제는"삼담"삼매경에」, 『조선일보』, 1938.01.03. 15면, 『조선뉴스라이브러리100』online, 조선일보.
  12. 상황에 맞는 연기,「시바이」,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영상콘텐츠제작사전.
  13. 배우학교창시자 칠전팔기!이제는"삼담"삼매경에」, 『조선일보』, 1938.01.03. 15면, 『조선뉴스라이브러리100』online, 조선일보.
  14. 윤금선, 2006, 「1920-40년대 배우양성론과 그 활동 양상」, 『한국언어문화』 제30집,
  15. 윤금선, 2006, 「1920-40년대 배우양성론과 그 활동 양상」, 『한국언어문화』 제30집,
  16. 윤금선, 2006, 「1920-40년대 배우양성론과 그 활동 양상」, 『한국언어문화』 제30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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