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팀: LSH21KHU, KYW21KHU, LZH21KHU
연구 목적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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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단재[丹齋] 신채호, <조선혁명선언>[2] |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질 수 있으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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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은식, <한국통사>[3] |
- 서문
- 역사란, 말하자면 슬기로운 노인의 조언과 같다. 어떤 프로젝트를 처음 진행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이전에 진행됐던 유사한 프로젝트를 훑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요소에 집중해서 진행할지, 혹은 어떤 소스들을 수집해야 하는지 등 프로젝트의 기본적인 뼈대가 갖춰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민이 될 때 우리는 몇 백년, 혹은 몇 천년 먼저 살아간 선조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인다.
- 역사란, 말하자면 슬기로운 노인의 조언과 같다. 어떤 프로젝트를 처음 진행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이전에 진행됐던 유사한 프로젝트를 훑어보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요소에 집중해서 진행할지, 혹은 어떤 소스들을 수집해야 하는지 등 프로젝트의 기본적인 뼈대가 갖춰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고민이 될 때 우리는 몇 백년, 혹은 몇 천년 먼저 살아간 선조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인다.
- 자주성의 역사
- 예를 들어, '자주성'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역사는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삼국시대 말기의 이야기다. 당시의 신라 왕이었던 김춘추는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여들여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길 바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당나라와의 나당동맹으로 신라는 삼국을 일통할 수 있었지만 그 방식이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여 이룩한 비-자주적인 것이었고, 이로 인해 통일 신라 영토 곳곳에 당의 도독부가 설치되어 많은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다.
- 다음은 대한제국시기의 일이다. 민자영은 삼국간섭 이후 일본의 침략 야욕을 견제하고자 러시아와 손을 잡고자 했다. 그러나 을미사변이 일어났고 곧바로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피난해있는 동안, 러시아를 포함한 여러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은 극심해졌고 나라 상황은 이전보다 나쁘게 흘러갔다. 해당 사례는 무능한 지도부가 일반 시민들의 평범한 삶을 어떤 식으로 파괴시켰는지 알려주는 본보기이기도 하다.
- 예를 들어, '자주성'이라는 가치의 중요성을, 역사는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삼국시대 말기의 이야기다. 당시의 신라 왕이었던 김춘추는 당나라라는 외세를 끌여들여 백제와 신라를 견제하길 바랬고 실제로 그렇게 됐다. 당나라와의 나당동맹으로 신라는 삼국을 일통할 수 있었지만 그 방식이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여 이룩한 비-자주적인 것이었고, 이로 인해 통일 신라 영토 곳곳에 당의 도독부가 설치되어 많은 내정간섭을 받게 되었다.
- 결론
- 당나라를 끌어들여 삼국을 통일하고자 했던 김춘추와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고자 했던 민자영. 자주적으로 국가의 역량을 키우지 않은 채 강력한 외부 세력에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역사는 여러차례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 독립팀은 부당한 외부세력이 우리를 억압할 때, 그것에 저항하는 여러 방법을 얻고자 일제 강점기 경성부 독립운동의 여러 모습을 조사하고자 했다. 그 중에는 군대를 조직하여 용감히 맞서싸운 세력도 있었고 역사와 문학 교육에 집중하여 민족의 혼을 고취시킨 세력도 있었다. 그들이 택했던 방식 중에는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없다. 다만 우리는 그들의 삶의 태도를 배울 뿐이다. 독립팀은 그 중에서도 20년대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냈던 세 의열단원의 의거에 집중하여 연구하기로 했다. 세 의열단원이란 김상옥, 김익상, 나석주를 의미하며, 이들이 이뤄낸 혁혁한 공을 아주 자세히 고찰해보기로 했다.
연구 대상
국내 상황
- 기존 통치체제: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제는 일본 육군 헌병을 동원하여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헌병경찰통치기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정식 명칭은 무단통치[武斷統治]로 호반 무 자에 끊을 단 자를 쓴다.[5]이때 헌병경찰제도, 조선 태형령[6], 토지조사사업, 어업령, 산림령, 회사령, 우민화교육 등 수많은 악법이 시행되었으며 본격적으로 국권을 피탈하기 시작했다.
- 3.1운동: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일제의 한일병합에 저항하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이후 대한독립만세의 소리는 전국으로 확대되며 약 200만명이 참여했고 그 중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 체포됐으며 민가 715호, 교회 47개소, 학교 2개소가 파괴되었다.[7] 3.1운동은 비록 실패한 운동이지만 민중의 합일을 이뤄냈다는 점, 아래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빛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3.1운동의 실패로 대중들은 비폭력 저항운동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고 이로인해 1920년대에는 무장투쟁이 활발히 일어나게 되었다.
- 통치체제의 변경: 3.1운동을 기점으로 신임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는 제독은 문화통치라는 새로운 방향의 정책을 내세우게 된다. 헌병경찰은 보통경찰로 대체되고, 태형령은 폐지하며, 언론/출판의 자유가 보장[8]되고, 조선인의 정치 참여를 가능케 하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와 같은 유화정책은 표면적으로 민중들에게 상황이 이전보다 나아진듯한 느낌을 줬으나 문화통치의 이명이 기만적 문화통치인 것을 생각해보면, 실제론 상황이 전보다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실제적으로 효용성이 있는 조약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조항 | 실제 |
---|---|
문관의 조선총독 부임을 가능케 한다. | 1945년 광복 전까지 8인의 총독은 모두 군 출신이었다. |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실시한다. | 헌병에서 경찰로 바뀌었지만 경찰은 6800명 정도 증원되었고 특별고등경찰제도까지 시행하였다. |
언론, 출판의 자유를 보장한다. | 총독부에 의한 검열이 이루어졌고 언제든지 기사삭제 및 정간명령이 떨어질 수 있었다.[9] |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 |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25세 이상 국세 5원 이상을 납부하는 성인 남성에 한해 주어졌고, 따라서 기업가, 지주, 고위 공무원, 지식인 등의 일부 부유층만 향유하는 권리가 되었다.[10] |
- 신민회의 결성: 1907년 국내 애국지사들에 의해 결성된 항일비밀조직으로, 1910년 12월 전국간부회의를 열어 국외 독립군기지 장소를 확정짓고 대일 무장투쟁을 공식 노선으로 채택했다. 만주 서간도의 영토를 구입하고 그곳에 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할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았다. 사실상 이회영의 신흥무관학교 설립의 직접적 배경이 된 사건이다.
국외상황
이회영의 신흥무관학교
"생과 사는 다 같이 인생의 일면인데 사를 두려워해 가지고 무슨 일을 하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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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회영 |
- 이회영: 조선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사상가이다. 조선 말 10대 부자 안에 들 정도의 재력 가문의 6형제 중 넷째이고 바로 아랫동생이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인 이시영이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회영 6형제는 가문의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남만주 삼원보로 이주하여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경학사는 농업, 실업 등 교육을 장려하고 군사훈련을 하기 위한 결사 조직이었고, 신흥강습소는 독립운동 전사를 기르는 군사학교였다.
- 신흥무관학교: 1912년, 경제적 어려움을 해소하고 지리적 요점을 갖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통화현 합니하로 이주하게 되었다. 해당 지역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둘러싼 요새와 같은 지형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 기지로서의 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이름도 신흥무관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 신흥무관학교의 성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 부대에 파견되어 혁혁한 공을 세웠고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홍범도 장군의 대한의용군으로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김원봉 역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고, 그를 비롯한 졸업생 대부분이 의열단을 구성하여 무장투쟁 독립운동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의열단
- 의열단은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로 단장인 약산 김원봉의 지휘 아래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11]을 했다. 1919년 11월 9일에 설립되었으며, 상하이에 본부를 두고 한반도, 중국,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의열단의 「공약 10조」
1.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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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34 |
설립 배경
- 설립의 직접적 배경이 된 것은 1919년에 일어난 3.1운동의 실패[15]였다. 비폭력 투쟁인 3.1운동이 일제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목도한 독립운동가들은 광복을 위해 무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취할 것을 결심했다[16]. 이에,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한 파괴활동을 주 목적으로 삼았다[17].
「의열단의 칠가살[七可殺]」; 의열단이 규정했던 암살의 대상
1. 조선총독 이하 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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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34-p.35 |
의열단이 규정했던 파괴 대상
1. 조선총독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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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34-p.35 |
의열단에 관한 해외 기사
중국 보도 기사
한국의열단에 닥친 대재난
동경의 여러 신문에는 연일 한인이 북경에서 조직한 의열단 관련 소식이 보도되었다. 소식에 의하면, 의열단은 단장 金元鳳을 제외한 단원 16명 전원이 일본당국에 체포되어, 이미 조직이 와해되었다 한다. 그 경과상황을 아래에 소개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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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晨報』, 1923년 4월 15일 |
일본 보도 기사
독립당원으로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 조선총독의 관저에 폭탄을 던진 것은 우리들이라고 호언
[上海 30일 東方 발] 田中 대장을 암살하려고 한 범인 조선인은 金益相(28), 吳誠龍[崙](23)이라고 하며 포박되고 나서도 태연자약하게 工部局 경찰에 끌려간 그들은 북방에서 와서 이곳 프랑스조계에 3월 10일경부터 임시로 거처하며 이번의 기도를 계획하였고 이곳에서 폭탄을 제조한 자인 듯하다. 신문에 대해서는 上海의 조선독립운동에 관계하고 있는 자임을 부인하고 작년 가을 경성 총독 관저에 3개의 폭탄을 던진 것은 그들이라고 호언하고 있다. 그들은 물론 독립당원이며 수사 결과 그들의 임시 거처에서 폭탄 제조 재료 및 단총탄이 발견되었다. 또 흉행의 이유에 대해서는 독립당원으로서 이름을 날리고 또 세계의 視聽을 조선에 끌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20일 오전 중에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어 신문이 시작되었다. 船津 총영사는 유탄으로 죽은 미국 부인 스나이더를 위해 미국영사관을 방문하고 사망자의 남편 스나이더 씨에게 유감의 뜻을 표했다. 장례에는 일본영사관 및 田中 대장이 각각 화환을 보내기로 했다. [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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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讀賣新聞』(朝刊), 1922년 4월 1일 |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
1921년 9월 10일부터 1921년 9월 15일까지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의 경과를 신문기사와 도서 박태원의『약산과 의열단』을 통해 조사하였고, 장소를 중심으로 사건의 전후를 파악하고자 했다. 김익상의 이동 동선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날짜별로 이동동선을 연결한 지도를 게시하였다.
- 김익상의 이동동선
1921년 9월 10일, 9월 12일, 9월 13일 김익상의 이동동선이다. 9월 10일은 빨간색, 9월 12일은 파란색, 9월 13일은 초록색으로 표시했다.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과 폭탄투척사건 이후 1923년 1월 17일, 1923년 1월 22일 김상옥의 투쟁 및 그의 죽음에 대해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중국에서 보도된 김상옥 자료를 바탕으로 당시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에 대한 제3자의 시선을 알 수 있었다.
나석주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사건
1926년 12월 26일부터 1926년 12월 28일까지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사건 경과를 도서 박태원의『약산과 의열단』을 통해 조사하였고, 장소를 중심으로 사건의 전후를 파악하고자 했다. 나석주의 이동 동선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날짜별로 이동동선을 연결한 지도를 게시하였다. 또한,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사건에서 발생한 피해자들의 정보와 경과를 조사하였는데, 이는 12월 28일 나석주의 이동동선과 사건경과를 보다 상세히 보여준다.
- 나석주의 이동동선
1926년 12월 26일, 12월 27일, 12월 28일 나석주의 이동동선이다. 12월 26일은 빨간색, 12월 27일은 파란색, 12월 28일은 초록색으로 표시했다.
- 당시 피해자 경과
이름 |
경과 |
의료시설
|
---|---|---|
경기도 경찰부 경무과 경부보 '전전유차(田畑唯次)' |
심장을 맞아 운반하여 가던 자동차 안에서 절명 | |
수위 '송본필일(松本筆一)' |
머리를 맞고 문밖으로 뛰어나가 동 층대 위에 쓰려져 있었음 | 총독부의원으로 운반 중 절명 |
천진당시계 점원 '목촌열조(木村悅造)' |
가슴을 맞고 그 길로 달아나 맞은편 중국자전거포에 가서 쓰러져 있었음. | 총독부의원으로 운반 중 절명. |
동척 사원 '무지광(武智光)' |
가슴을 두 번이나 맞은 위에 층층대에서 떨어지어 부상까지 입은 관계로 생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음. 그 후로 경과 양호. | 총독부의원 |
동척 기술과 차석 '대삼태사랑(大森太四郞)' |
가슴을 맞아 생명이 심히 위독한 중에 있었으나, 그 후로 경과가 양호해짐. | 동 의원 |
잡지기자 '고목길강(高木吉江)' |
가슴을 맞아 생명이 위독했었지만, 그 후로 경과 양호. | 옥정 2정목 뇌호의원 |
동철 기술과장 '능전풍(綾田豊)' |
오른편 팔과 가슴을 맞았으나, 총알이 갈비에 닿아 내부로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경상을 입었음. | 경락정 식촌의원 |
연구 방법
1920년대 경성에서 일어난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사건'의 경과를 시각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어 온톨로지를 구성했다. 사건의 흐름을 표현함과 동시에 사건의 주요 인물, 단체, 장소, 기관 등의 각 관계 또한 나타내고자 했다.
우선 한 시간대에 일어난 사건을 중심으로 그것의 주동인물과 반동인물, 사건의 경과, 사건 발발의 장소, 기관을 그래프에 표시했고, 사건의 경과는 개별 사건의 일면을 개별 노드로 만들어서 isNextInSequence라는 링크로 전후관계를 표시했다.
보다 세부적인 내용으로, 독립 투사들이 은닉을 위해 사용한 가명이나 본명이 드러나지 않은 사망자의 경우 속성으로 추가하였고, 사건에 연루된 이들 중 확실히 살해당한 사람들과 상해를 입은 사람을 확실히 구분하여 다른 링크 데이터를 사용했다.
온톨로지(Ontology)
온톨로지 그래프(OntoGraph)
클래스(Class)
- Group: 단체
- Person: 인물
- Time: 시간
- Institution: 기관
- Place: 장소
- Event: 사건
- News: 신문
- Article: 기사
릴레이션(Relation)
- isMemberOf: 의 구성원이다(인물-단체)
- isLeaderOf: 의 단장이다(인물-단체)
- WorksAt: 에서 근무하다(인물-기관)
- isPartOf: 의 부분이다(사건-시간/사건)
- isLocateIn: 에 위치하다(기관-장소)
- OccursIn: 에서 발생하다(사건-장소)
- OccursAt: 이때 발생하다(사건-시간)
- Leads: 을 주도하다(인물-사건)
- PostAt: 에 게재되다(사건-기사)
- isAbout: 에 관한것이다(기사-사건)
- Kills: 을 죽이다(인물-인물)
- Results: 의 결과이다(사건-사건)
- isPredecessorOf: 의 전신이다(기관-기관)
- isNextInSequence: 의 다음순서이다(사건-사건)
- Harms: 에게 상해를 입히다(인물-인물)
- TreatAt: 에서 치료받다(인물-기관)
- isTransportTo: 로 운송되다(인물-기관)
- isFriendOf: 와 동지이다(인물-인물)
- hasAttribute: 속성을 가지다(인물/사건-속성)
- Graduates: 을 졸업하다(인물-기관)
- isFamilyOf 의 가족이다(인물-인물)
- isStartingpointOf: 의 시작이다(사건-사건)
- isDisguisedAs: 로 변장하다(인물-인물)
- isBecause: 인 까닭에(사건-사건)
속성(Attribute)
- Person
- 이명: 독립투사들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사용한 가명
- 직업: 이름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인물을 직업으로 표기
연구 데이터
노드 데이터(총 282건)
- Person 35건
- Event 166건
- Institution 18건
- Group 1건
- Place 37건
- Article 10건
- Newspaper 10건
- Report 1건
- Press 4건
링크 데이터(총 270건)
- WorksAt 13건
- isTransportTo 3건
- TreatAt 4건
- Graduates 1건
- isMemberOf 12건
- isLeaderOf 2건
- Kills 7건
- Harms 4건
- hasAttribute 3건
- isFriendOf 1건
- isFamilyOf 2건
- isPartOf 7건
- isNextInSequence 147건
- isBecause 4건
- Leads 23건
- isAbout 17건
- PostsAt 20건
Semantic Network
- 2021.06.09. 버전
연구 결과
데이터 분석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사건이 7개월 가량 지난 이후에도 일본은 사건의 배후 단체를 파악하지 못했다. 해당사건 이전에도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사건,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 사건이 있었음에도 일련의 소동이 의열단의 소행인지 알아내지 못했다.
나석주 사건 역시 사건 발생일과 신문 보도일에 유의미한 간격이 있었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제가 사건의 보도를 제한한 것이다.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 앞에 순사들이 있었음에도 일제의 핵심 식민기관 두 개소를 성공적으로 습격한 나석주 의사와 그가 속한 단체인 의열단은 일제의 예상을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세 사건 모두 사건 발생 시점과 사건 보도 시점에 차이가 있다. 이는 일제가 폭탄을 투척한 인물을 잡고, 그 인물의 뒤에 어떤 단체가 있는지 파악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고, 또 각 사건의 연관성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데이터 해석
무장독립투쟁의 한계
무력을 동원한 독립운동에는 상해와 죽음이 뒤따랐다.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제적으로 통치하는 데에 있어 중심지였던 곳(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하려던 만큼 목숨을 내놓아야 할만큼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고, 실제로 김상옥과 나석주와 같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 표는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폭탄투척사건'에서 발생한 상해 및 사망자이다.
독립운동 상해 및 사망자
사건 |
이름 |
피해 정도
|
---|---|---|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19210912) |
조선총독부 2층 회계과에 있던 사람들 | 큰 폭음과 함께 의자와 책상, 유리창은 부서지고 날라갔고, 그 방에 집무하던 수십 명의 관원들은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 쓰러졌음. |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19230112) |
행인 남자 6명과 여자 1명 | 폭탄 폭발로 인해 건물 일부가 파손되며 행인 7명이 중경상을 입음. |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19230117) |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이며 형사부장인 전촌진칠 | 김상옥과의 총격전에서 사살됨. |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19230117) |
종로경찰서 경부 금뢰금태랑, 매전신태랑 | 김상옥과의 총격전에서 사살됨. |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19230117) |
종로경찰서 경찰 수 명 | 총격전으로 인해 중상을 입음. |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19230122) |
일본 군경 15명 | 3시간동안 총격전을 벌이다가 사살됨. |
종로경찰서 폭탄투척사건(19230122) |
김상옥 | 남은 총알 한 발로 자결함. |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61228) |
고목길강 | 동양척식회사 정문 안 수위 책상 앞에 앉아 무엇을 쓰고 있다가 총을 가슴에 맞음. |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61228) |
무지광 | 동양척식회사 식당에서 올라가다 가슴에 총을 두 발 맞음. |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61228) |
대삼태사랑 | 동양척식회사 2층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에 있다가 가슴에 총을 맞음. |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61228) |
능전풍 | 동양척식회사 2층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에 있다가 가슴에 총을 맞음. |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61228) |
송본필일 | 동척 안에 있는 조선철도주식회사 뒤쪽 정문 현관 안에 앉아 있다가 머리에 총을 맞음. |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61228) |
목촌열조 | 동척 안에 있는 조선철도주식회사 뒤쪽 정문 현관에 송본필일과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 가슴에 총을 맞음. |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61228) |
전전유차 | 황금정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가슴에 총을 맞음. |
동양척식회사 폭탄투척사건(19261228) |
나석주 | 자신의 가슴을 향해 권총으로 세 방을 쏨. |
3.1 운동 발발 당시 독립선언서를 읽은 김원봉은 지도이론에 대해 불만을 느꼈다. 이는 곧, 현실에 대한 불만이었다[21]. 물론, 그도 암살과 파괴쯤으로 쉽게 조국의 광복을 얻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왜적과의 타협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22]. 다시말해, 그는 일본에 대한 복수가 더 급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과 의열단의 무력 투쟁이라는 방향성은 누군가의 목숨, 또 누군가의 피해로 이어졌다. 무장독립운동은 단원들의 피해와 희생을 전제했던, 그리고 또 일회적이라는 점에서 방향성의 아쉬움이 있다.
국내외 독립투사들의 노선 변경
우선 가증한 왜적에 대하여 복수하자. 이는 단순히 복수로만 그치지 않는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의 왕성한 비타협적 투지를 발현할 때, 일반민중은, 또한 크게 계발되고 각오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민중이 각오할 때 우리의 혁명은 이루어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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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198 |
일제에 무력으로 복수하는 것을 목표로 둔 의열단의 활동은 1920년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30년대로 넘어가며 무력으로 복수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을 이루어낼 수 없음을 의열단의 단장 김원봉은 깨닫게 된다.
혁명은, 곧, 제도의 변혁이다. 몇몇 요인의 암살과, 몇 개 기관의 파괴로는, 결코, 제도를 변혁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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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198 |
1919년 11월 10일, 길림성 파호문 밖에서 약산 이하 13인의 동지가 모여 의열단을 조직한 이래로 1925년까지 7년간 의열단이 계획하고 행동한 사건은 수백에 넘고 일에 참여한 인원은 셀 수 없이 많았다[23]지만, 7년간의 폭력, 암살, 파괴, 폭동을 통해 김원봉이 알게된 것은 이러한 수단과 방법으로는 결코 독립을 얻어낼 수 없다는 것[24]이었다. 즉, 일제에 속한 어떠한 기관이나 인물을 암살하고 파괴한다고 해서 일제로부터 독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국내외에서 무장투쟁의 노선은 사장되었고 실력양성론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다시말해, 일본 제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백성이 많이 배우고,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뤄낼 수 있는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강조됐다.
연구 후기
LSH21KHU | 🤔 | 한 학기 동안 위키 작업을 하면서 진심으로 흥미가 생겼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개인 위키도 만들어보고 싶을 정도로요! 와~ 재밌었당 *^^* |
KYW21KHU | 😊 | 기계치(이자 컴퓨터치)인 저에게 이번 연구는 아주아주 커다란 도전이었습니다ㅎㅎ:) 저의 이 도전을 함께 해준 우리 독립팀 팀원들... 한 학기 동안 저의 물음표들과 뭔가 잘 안된다는 실패 후기들에 일일이 답해주고 받아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ㅜㅜ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
LZH21KHU | 🤟🏻 | 한 학기 동안 조원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았고 위키 페이지 지식도 매우 많이 배웠습니다^^ |
코멘트
신여성팀
MHS21KHU | 👍🏻 | 이미지자료나 도표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주셔서 발표의 내용이 잘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저도 고등학교 한국사 시간에 독립운동사를 배우면 같은 듯 다른 듯 비슷한 독립운동단체의 계보를 이해하는 게 정말 어려웠는데 이렇게 위키페이지를 이용해 독립운동의 역사와 맥락이 정리되어서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좋은 발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
AHJ21KHU | 😊 | 식민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이 배우고, 실력을 키워서 독립을 이뤄낼 수 있는 스스로의 역량을 키우는 것이 강조되었다는 결론이 인상적입니다. 배우고 아는 것의 힘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강한 무기라는 생각에 배움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프로젝트 결과를 읽어보며 왜 배우는지에 대한 고민도 해볼 수 있었습니다. 다소 동떨어진 감상이긴 하지만 말이죠...ㅎㅎ 데이터들을 찾아내고, 정리하기가 상당히 힘드셨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내신 모습을 보니 역시!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하셨을 흔적들이 여기저기 보이네요. 대단하십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엄지 척! |
LHY21KHU | 🙏🏻 | 독립운동에 대해 배우지만 실제적으로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는 잘 몰랐는데 이렇게 가시적으로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만큼 노력하신 게 항상 보여서 저희 팀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종종 했습니다. 그리고 독립팀 연구 덕분에 정형화되지 않은 어떤 것들에 대한 노드 설정 기준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
조선극장팀
CWS21KHU | 😊 | 그동안 보았던 독립운동과는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던 주제였던 것 같습니다. 방송이나 역사책에서 보여지는 독립운동은 누가 어디서 무얼 부쉈다, 누구를 암살했다, 죽이려다 실패했다와 같이 단편적인 사건들만 보았는데, 의열단이 생겨나게 된 계기와 작전들, 그리고 무장투쟁의 한계를 느끼는 결론까지 연결되기 때문인 것 같아요. |
LHR21KHU | 😊 | 연구하신 자료를 보면서,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의열단의 항일운동 노선이 변경되는 지점에서는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폭력으로는 결국 혁명에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꼈을 당대 독립운동가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독립운동과 같은 혁명적 운동에는 폭력은 필요악처럼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폭력만으로는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없는, 폭력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말입니다. 정말로 기억되어야 하는 역사가 제대로 기억되지 않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 아쉬울 뿐입니다. |
KJG21KHU | 🙏🏻 | 쉽지 않은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위키라는 형식으로 다른 의미있는 지점들을 본 것 같아 좋았습니다. 이전까지 역사에 대해 암기식으로만 접한 것이 전부였는데, 사건을 지도에 마커와 동선으로 나타낸 것이나 네트워크 그래프와 같이 새로운 방식으로 한눈에 보기 쉽게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새로웠습니다. 한 학기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
모던팀
CSH21KHU | 👍🏻 | 1920년대의 한국의 독립운동은 지금까지 배워왔지만, 이렇게 자세하게 알게 된 것은 처음인거 같습니다. 위키와 기말발표를 들으면서 당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몸과 마음을 희생하신 독립투사분들에게 정말 감사하고, 이분들이 있어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세한 내용과, 표를 통해서 더 잘 알게 되었습니다. |
KGR21KHU | 😊 | 사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대한 정보는 이 시기에 대해서 가장 먼저 접할 수 있는 정보임과 동시에 가장 추상적인 형태로 접하게 되는 정보가 아닌가 싶습니다. 네트워크 그래프라는 도구를 통해서 자세히 사건을 연결해주셔서 보다 면밀히 사건 간의 관계과 독립운동의 성격이 변화하는 추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독립운동이라는 민중이나 투사들의 연대가 필요한 활동에 있어 이러한 유기적인 관계를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고도 주요한 작업이면서 사실 인간사가 딱딱 떨어지는 일이 아니다보니 디지털화하기 어렵기도 할 텐데 잘 소화해주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
KSH21KHU | 🙏🏻 | 사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1920년대와 1930년대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분노를 느끼지 않을까 싶습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이고, 현재까지도 청산되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남아있죠..저같은 경우엔 경성기를 연구하면서 역사적 비극을 다루는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자 했는데, 어떠한 부분을 연구하든 식민지의 암울한 현실을 배제할 순 없는 것 같더라구요. 경성기를 다루는 강의에서 식민지배와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는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주제이기 때문에 어쩌면 가장 힘드셨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기존 연구들과 구별되는 유의미한 데이터들을 찾는 것이 오히려 더 골치아프죠.. 어쨌든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
경성팀
PHS21KHU | 👍🏻 | 저희 조와 같이 데이터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것 보다는 그 컨텐츠 자체에 파고든 점이 닮아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덕분에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깊고 자세한 내용들을 알 수 있어서 더욱 좋았던 발표였습니다. 감사합니다! |
SYJ21KHU | 😊 | 조선의 독립과 관련된 사건, 인물들이 기록되어 있어 추후 연구에 도움이 될 자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콘텐츠 중심 자료이기 때문에 독립운동가의 사진이나 그들의 이동 경로가 나온 지도를 볼 수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또한, 이동 경로를 선으로 연결한 지도는 추후 자료를 보는 사람들에게 시각적으로 인상을 깊게 남길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
KM21KHU | 🙏🏻 | 개인적으로 이동동선을 지도를 사용하면서 색깔을 바뀌고 만들으셨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색깔을 바꾸니까 어떻게 이동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재미있게 봤습니다.그리고 독립운동에 대해 이번 발표를 통해서 잘 생각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타임맵을 통해 사건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며 연구 결과에서도 사망자에 대해 알았으니 독립운동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 |
참고 자료
- 「의열단, 항일의 불꽃- 일제 간담 서늘케한 무장투쟁사」, 『경남신문』, 2019년.8월.23일.
『경남신문』online , 경남신문. -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1923. 온라인 참조: "[조선혁명선언]",
『위키문헌』online , 위키피디아. - 박은식, 『한국통사』, 1915.
- 『문체부 해외문화홍보원』
online , 문체부 해외문화홍보원.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신문』제 127호(1922년 5월 27일 발행)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신문』제 156호(1923년 3월 1일 발행)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독립신문』제 161호(1923년 6월 13일 발행)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39, 39권 중국보도기사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41, 41권 일본 · 미국보도기사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주석
- ↑ 「의열단, 항일의 불꽃- 일제 간담 서늘케한 무장투쟁사」, 『경남신문』, 2019년.8월.23일.
『경남신문』online , 경남신문. - ↑ 신채호, 『조선혁명선언』, 1923. 온라인 참조: "[조선혁명선언]",
『위키문헌』online , 위키피디아. - ↑ 박은식, 『한국통사』, 1915.
- ↑ 『문체부 해외문화홍보원』
online , 문체부 해외문화홍보원. - ↑ 無斷, 즉 없을 무 자가 아니다.
- ↑
- ↑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 ↑ 이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다.
- ↑ 출판의 자유는 상대적으로나마 보장되었는데, 이로인해 문인의 창작활동이 활발해졌다. 폐허, 백조, 개벽과 같은 문예동인지가 활발히 출간되었다.
- ↑ 애초에 행정을 감시, 견제하는 권한 자체가 없었으며 단순한 자문의 역할을 하는데 그쳤다.
- ↑ "의열단",
『위키백과』online , 위키피디아. - ↑ 동지를 애호하고, 단결을 공고히 하자는 뜻임.
- ↑ 수명을 온전히 마치자는 관념을 타파하려는 것임.
- ↑ 개인이 아니면 전체를 이룰 수 없고, 전체를 떠나서는 개인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 ↑ "의열단",
『위키백과』online , 위키피디아. - ↑ "의열단",
『위키백과』online , 위키피디아. - ↑ "의열단",
『위키백과』online , 위키피디아. - ↑ 대만 주민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왜적의 압제 아래 있음으로 하여, 같은 약소민족으로써 심심한 후의와 동정을 표하자는 주지에서 나온 것이다.
- ↑ 「158. 한국의열단에 닥친 대재난」, 『晨報』, 1923년 4월 15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109. 독립당원으로서 이름을 날리기 위해 조선총독의 관저에 폭탄을 던진 것은 우리들이라고 호언」, 『讀賣新聞』(朝刊), 1922년 4월 1일,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198
-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198
-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p.197
-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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