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근대식 국립극장 원각사의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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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원각사사진

원각사는 전통건축과 근대건축의 가교가 될 수 있는 근대건축사에 중요한 건물이다. 뿐만 아니라 110년 전에 실재했던 역사적·문화적 공간을 문화 중심지인 종로구에 복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 [1] 그런 점에서 한국문화예술 교육적으로 초중등 학생들에게 알려줄 가치가 있다. 원각사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원각사(圓覺社)는 1908년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국립극장으로, 창극(唱劇)이 주가 되고 잡가(雜歌)와 잡희(雜戱)도 공연한 상설극장이다. 서울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에 세워졌던 개화기의 사설극장이자 최초의 왕립극장이며 상설 실내극장이다.[2] 이 극장은 1902년에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다. 협률사가 1906년에 문을 닫자 극장 건물이 한동안 관인구락부(官人俱樂部)로 사용되다가, 1908년 7월 박정동(朴晶東)·김상천(金相天)·이인직(李人稙) 등이 건물을 임대받아 내부수리를 하고 원각사라는 극장을 만들었다. 그들은 전속단체를 재구성하여, 김창환(金昌煥) 등 명창(남자) 40명과 가기(歌妓, 여자) 24명 등 64명의 배우를 두었다. 당대 최고의 국창(國唱) 이동백(李東伯)이 단장이었고, 요식업계의 태두였던 안순환(安淳煥)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3]1909년 궁내부 대신 이용익(李容翊)이 내탕금(內帑金)으로 지금의 새문안교회 자리에 로마식 원형극장을 지었다. 1910년부터는 연설회장과 연희장으로 이용되었지만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4] 그렇다면 지금부터 원각사의 구체적인 역사와 더불어 현재에 남아있는 혹은 진행되고 있는 활동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내용

원각사 역사


원각사의 역사를 표로 정리한 것은 다음과 같다.

년도 설명
1902 1902년에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5]
1906 1906년에 문을 닫자 극장 건물이 한동안 관인구락부로 사용[6]
1908 1908년 7월 박정동(朴晶東)ㆍ김상천(金相天)ㆍ이인직(李人稙) 등 3명이 건물을 대여받아 내부수리를 하고 원각사라는 극장을 개관하였다. 그들은 전속단체를 재구성하여, 배우는 김창환(金昌煥) 등 명창 40명과 가기(歌妓) 24명을 두었다. 당대 최고의 국창(國唱) 이동백(李東伯)이 단장이었고, 요식업계의 태두였던 안순환(安淳煥)이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판소리ㆍ민속무용 등 재래의 연희를 주로 공연하였으며, 판소리를 분창(分唱)하여 창극을 만들기도 하였다. 새로운 것을 원하는 시대 추세에 따라 창작창극을 시도하였으며,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銀世界)>를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하였다.[7]
1909 원각사는 당시의 다른 극장들처럼 재정적 고충을 겪었고, 결국 1909년초에는 잠시 문을 닫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09년 4월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이 조선상업은행취체역 김시현(金時鉉)에게 운영권을 넘기도록 하여 김시현이 맡았다. 그 뒤 공연활동이 활발해져, 경시청의 지시에 따라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ㆍ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연습을 하기도 하였다. 원각사는 신연극을 공연한다고 하면서도 창극 <춘향가> <천인봉(千棚峰> <수궁가> 등을 공연하였다. 1909년 11월의 <수궁가> 공연 이후 실제로 공연활동은 끝나고 공회당으로 변모해갔다.[8]
1910 즉, 국민회본부사무소로 쓰였고, 1910년부터는 연설회장과 연희장으로 가끔 대여하였다.[9]
1914 1914년 화재로 소실되었다.[10]


원각사 공연



판소리는 원래 고수의 북장단에 소리하던 독창이었으나, 원각사 시절에 약간의 무대장치로 배역마다 여러 인물이 출연하여 연기하며 분창(分唱)하는 창극이 처음 시작되었다. <춘향가>·<심청가> 등이 창극화되고, <귀의 성(鬼-聲)>· <치악산(雉岳山)> 등 신소설(新小說)이 극화되어 상연되었다. 창극에는 김창환·송만갑·이동백·김창룡·이화중선 등 많은 판소리 명창들이 출연하였고, 경서도창(京西道唱)과 재담에는 박춘재·문영수 등이 출연하였다. 원각사는 3년이 못되어 해산되고, 협률사·장안사·연흥사(延興社)·광월단(光月團) 등이 조직되어 광무대(光武臺)를 중심으로 지방공연에 주력하였다. 5명창의 한 사람인 김창환이 주석이 되고 직속 극단인 협률사를 통솔하였다. 이때, 여기서 상연된 작품으로는 <춘향전(春香傳)> <심청전(沈淸傳)> <배비장전(裵裨將傳)> <화용도(華容道)>등이 있다. [11]

현재의 원각사


원각사 터 표석


원각사 터 표석

원각사 터 표석은 1991년 설치되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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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극장 원각사가 있었던 곳. 1909년 이인직(李人稙1882-1916)의 설중매, 은세계 등이 공연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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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각사 터 표석 전문>[13]



현재 원각사 표석은 새문안교회 앞 보도 녹지에 설치되어 있어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원각사 자리에 새문안교회가 신축되었다는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있다. 따라서 표석의 위치를 신문로공영주차장 부근으로 이전할 것을 제안한다.[14]


지도를 불러오는 중...


원각사의 복원


현재 복원중인 원각사의 그래픽 조감도

종로구는 2012년 7월부터 관계전문가의 고증과 다양한 문헌 등을 참조해 당시 원각사 위치와 건축형식을 확인했다. 김영종 종로구청장은 “원각사는 전통건축과 근대건축의 가교가 될 수 있는 근대건축사에 중요한 건물"이라며 "가능하면 옛 모습 그대로 살려 전통문화공연 시설로 활용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15] 원각사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선진 문물 도입을 위해 노력하던 고종황제가 국가의 분위기를 일신하고 새로운 근대국가로의 변혁을 꾀하기 위해 칭경 40주년을 맞아 1902년 건립한 최초의 왕립극장이자 상설 실내극장이다. 이인직의 혈의 누, 신세계 등 신극과 판소리, 무용, 영화 등을 공연했던 명실상부한 우리나라 근대식 공연문화의 요람으로 1914년 화재로 소멸되기까지 굳건한 위치를 지켜왔다. 종로구는 이러한 원각사의 역사성과 의미에 무게를 두고 2013년 7월부터 관계 전문가 고증과 다양한 문헌 등을 참조해 당시 원각사의 위치와 건축형식을 확인한 후 복원을 추진 중이다. 2013년 말에는 복원의 첫 단추로 국악계, 연극계, 판소리계, 근대 문화재 분야 등 각계의 원로 등이 참여한 가운데 ‘원각사 복원을 위한 발기인간담회’도 가졌다. 당시 건물 형태는 원형 평면에 원뿔형의 지붕모양, 회색 양철지붕, 붉은 벽돌조 2층, 4각 박스형의 포치를 둔 모양으로 외형은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고 복원 대지를 원각사터 표지석 인근 일대로 선정했지만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다. 원각사는 전통건축과 근대건축의 가교가 될 수 있는 근대건축사에 중요한 건물이다. 뿐만 아니라 110년 전에 실재했던 역사적·문화적 공간을 문화 중심지인 종로구에 복원한다는 것 자체가 의미가 크다. [16]

참고문헌


주석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