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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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신흥무관학교

[1]

1912년 봄부터 망명지사들은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하현 추가가에서 동남쪽으로 90리 떨어진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1912년 7월 20일(음력 6월 7일), 100여 명이 모여 신흥무관학교 낙성식을 가지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신흥무관학교 위치는 바로 합니하가 학교 주위를 거의 360도 휘돌아 흘러 마치 해자(垓字)처럼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비로소 서간도 합니하에 모두가 염원하던 독립운동 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2]

내용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는 항일독립운동 기지의 건설을 위해 서간도 지역에 설립된 독립군 양성 학교로 1911년 6월 10일(음력 5월 14일) 이회영(李會榮)·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이상룡(李相龍) 등이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 설립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에서 출발하였다.

1907년 결성된 항일비밀조직인 신민회(新民會)는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항일무장투쟁을 공식노선으로 채택하고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래서 1910년 12월 이회영·이시영 등 6형제를 시작으로 이듬해 2월 이상룡, 김동삼 등이 가산을 정리하고 서간도로 집단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1911년 5월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였다. 신흥강습소의 개교식은 6월 10일에 열렸는데, 중등과정의 교육을 위한 본과 외에 3개월이나 6개월 과정의 속성과를 두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흥(新興)이라는 명칭은 신민회의 ‘신(新)’과 구국투쟁이 왕성하게 일어난다는 뜻의 ‘흥(興)’이 합쳐진 것으로, 이는 이 학교가 신민회의 조직적 결의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목표로 설립되었음을 나타낸다.

1912년 봄, 이회영 등은 퉁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 정착지를 확보해 이주하면서 그곳에 교사(校舍) 8동을 신축하여 학교를 정식으로 설립하였고, 1913년 5월에는 학교 명칭을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로 바꾸었다. 신흥중학교는 중학반과 군사반을 두었으나, 중학반은 얼마 뒤 지역의 다른 중학교로 넘기고 군사반에 전력하였다. 신흥학교 교관들과 졸업생들은 1914년 백두산 서쪽기슭에 백서농장을 만들어 대규모 병력이 머무를 수 있는 군영을 세웠으며,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군사훈련을 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수많은 청년들이 찾아오면서 일본군 출신의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 등도 망명해 신흥학교에 참여하게 되었다. 기존의 시설만으로 이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신흥학교는 1919년 5월 류허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로 본부를 옮기면서 신흥무관학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합니하에 있던 기존의 학교는 분교로 삼았으며, 퉁화현 치다오거우[七道溝]의 쾌대무자(快大茂子)에도 분교를 두어 모두 세 군데의 학교를 운영하였다. 고산자에는 2년제 고등군사반을 두어 고급간부를 양성했고, 합이하와 쾌대무자에는 초등군사반을 편성해 3개월과 6개월 과정의 군사훈련을 시켰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약 2,000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는데, 그들은 홍범도의 대한의용군과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1920년 5월부터 중국 군경(軍警)과 함께 서간도 일대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면서 학교를 정상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워졌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의 군대가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에서 승리를 거둔 뒤에는 일본군의 보복을 피해 신흥무관학교의 교관과 학생들이 모두 피신하였다. 결국 1920년 7월 신흥무관학교는 폐교되었으며, 지청천(池靑天) 등은 300여명의 신흥무관학교 졸업생과 생도들로 교성대(敎成隊)를 구성해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에 참여해 그해 10월 청산리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만주 지역에서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검성중학원(劍成中學院), 신창학교(新昌學校) 등이 세워지기도 했으나 신흥무관학교는 다시 문을 열지 못했다. 해방 이후 국내로 돌아온 이시영은 ‘신흥무관학교 부활위원회’를 조직해 1947년 2월 신흥전문학원(新興專門學院)을 설립했다. 신흥전문학원은 1949년 신흥초급대학(新興初級大學)으로 인가를 받아 1949년 7월과 1950년 5월에 각각 1회와 2회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러나 신흥대학은 경영난으로 1951년 5월 18일 조영식(趙永植)에게 인수되었으며, 1960년 경희대학교(慶熙大學校)로 명칭이 바뀌었다.[3]

참고문헌

부민단

주석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