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 대장암살사건
목차
개요
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대장 전중의일(田中義一)을 암살하기 위한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의 항일의거로, 상해황포탄사건으로 불리기도 한다. 박태원의 『약산과 의열단』을 바탕으로 상해 대장암살사건의 배경과 경과를 다루어보려 한다.
내용
김익상
1895년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마포구 공덕동)에서 태어나[2]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하였다. [3]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4]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 학교가 있는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지만[5], 중국 내전으로 인해 학교가 폐교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오게 되었다.[6] 상해에서 전차 회사의 전차 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입단하였다.[7]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8]
오성륜
함경북도 온성 출신으로, 일명 오함성(吳咸聲). 이 밖에도 전광(全光)·오동실(吳東實)·오범철(吳範喆)·오봉환(吳鳳煥) 등의 가명도 사용한[9] 오성륜은 1906년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건너가[10]뒤늦게 중학교를 다니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군자금 모금에 열신하였다.[11] 이해 가을 상해로 가서 의열단에 가입하고 압록강대교 폭파를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12]
이종암
이종암은 1896년 1월 12일 대구부 대구군 해북촌면(현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에서 아버지 이석능(李石能)과 어머니 남원 양씨 사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4] 6살 되던 1902년 대구군 서상면(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산동으로 이주하여 이곳에 본적을 두었다.[15] 그는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림학교를 다니다 1년 만에 중퇴했다.[16] 그 후 부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이마저도 학비 조달이 어려워 곧 중퇴하였다.[17] 1914년 고모부 정재학(鄭在學)의 후원으로 대구은행[4]에 입사한 그는 1년 후 출납계 주임으로 승진하고, 서희안을 반려로 맞아 결혼했다.[18]
그는 대구은행 출납계 주임으로서 금고 열쇠를 맡아 2년간 재직하였는데, 당시 항일비밀결사 대한광복회가 1916년 9월 일으킨 군자금 조달 목적의 '대구권총사건'과 1917년 11월 일으킨 친일부호 장승원(張承遠) 처단사건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심하였다.[19] 그는 조국광복투쟁을 결의하고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밀양군 출신의 김대지·구영필(具榮泌) 등의 동지를 얻었다.[20] 이종암은 은행 돈 1만 9000원을 가지고 미국유학을 하려다가 만주로 가서, 그 이듬해에 통화현(通化縣) 독립군군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배웠다.[21]
1919년 상해에서 폭탄제조법을 배우고 의열단을 조직한 뒤 단원 최경학(崔敬鶴)[22]에게 폭탄을 가지고 국내에 잠입하게 하여 밀양경찰서를 폭파하려다가 실패하였[23]고, 1920년에 의열단 부단장이 된 뒤 폭탄을 밀수입하여 일본 각 기관 파괴를 기도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24]1922년 3월 상해를 방문한 일본육군대장 다나카[田中衣一]를 저격하다가 실패하고 붙잡힌[25] 후, 탈출하여 1923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신임장을 휴대하고 군자금모금차 밀입국하여 활약하던 중 대구에서 일본관헌에 잡혀 13년형을 선고받았다.[26]
이후 대전형무소에 이감되어 복역을 계속했는데, 이때 그는 위장병·폐병·인후병 증세가 겹쳐서 병세가 매우 악화된 상태였고 결국 체포되어 복역한 지 4년 6개월만인 1930년 5월경 가출옥하였다.[27] 그러나 석방된 지 10일 만인 1930년 5월 28일, 병세가 위독해져 결국 3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28]그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29]
박태원의『약산과 의열단』을 통해 본 상해대장암살사건[상해황포탄사건]
상해대장암살사건[상해황포탄사건] 배경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던 조선총독부 폭탄투척사건이 약 6개월 이후 김원봉은 새로운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본 육군대장 전중의일(田中義一)[30]이 상해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 계획을 세운다. 약산은 일을 결행할 장소로 상해, 남경, 천진을 선택하고, 결행할 사람으로는 김익상, 오성륜, 이종암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전중의일은 본래 예정과 다르게 상해만 잠깐 들르고 선편으로 곧장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고, 상해에서만 일을 한다면 세 사람 모두 내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여 오성륜만 보내고자 하였으나 세 사람의 의지[31]로 모두 내보내기로 한다.
김원봉의 계획은 이러하였다. 한 사람은 전중의일이 배에서 내릴 때, 또 한 사람은 전중의일이 일본영사관에서 내어 보낸 자동차로 향할 때, 마지막 사람은 전중의일이 자동차에 오를 때 노리는 것이다. 역할을 정할 때, 세 사람은 두 번째 역할을 하기 위해 다투어 결정이 쉽게 내려지지 않았지만, 결국 첫 번째 역할은 오성륜이, 두 번째 역할은 김익상이, 세 번째 역할은 이종암이 하기로 결정되었다.
상해대장암살사건[상해황포탄사건] 경과
날짜 |
장소 |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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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3월 28일(대략 오후 3시 30분) |
상해 황포탄 홍구 공공마두(公共嗎頭) | 전중의일이 윤선을 타고 황포탄 홍구 공공마두에 도착하였다. 상해 황포탄 홍구 공공마두는 원래도 국제도시로써 중국인 외 조선인, 일본인, 서양인 등 각국 인들이 자신의 지인을 맞이하러 나오는 곳이었다. 1922년 3월 28일도 지인을 맞이하는 수많은 황포차, 마차, 자동차가 포진해있어 매우 혼잡했고, 특히 이날은 일본의 육군대장을 맞기 위해서 중국의 대관 및 일본 영사, 각국의 신문기자와 일본 거류민들, 만일을 경계하기 위한 많은 정탐들과 호위병, 순경, 헌병들이 모여 있어 매우 복잡했다고 한다. |
1922년 3월 28일 |
상해 황포탄 홍구 공공마두(公共嗎頭), 배에서 내리는 승객들이 잘 보이는 자리 | 배와 부두 사이에 사다리가 걸쳐지고 승객들이 차례로 내리기 시작하자 오성륜은 배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얼굴을 일일이 살폈다. 사진으로 익혀둔 전중의일의 얼굴이 보이자 주머니 속에서 단총을 쥐어 내었고, 전중의일이 마중 나온 무리들 앞에 서서 차례로 악수를 나누는 순간, 전중의일의 가슴을 향하여 조준하였다.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전중의일 앞으로 외국인 여성 한 명이 지나갔고, 세 개의 탄환은 모두 서양인 여성 가슴에 박혔다. 오성륜은 자신이 전중의일을 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른 채, 큰 소리로 독립만세를 외쳤다. |
1922년 3월 28일 |
상해 황포탄 홍구 공공마두(公共嗎頭), 일본 영사관에서 보낸 자동차가 보이는 자리 | 전중의일은 사람 틈을 헤쳐 자신이 탈 자동차로 뛰어갔다. 김익상은 오성륜이 잘못 사격한 것을 보고 오성륜이 있는 쪽을 향하여 "잘못 쏘았다"하고 외쳤다. 그리고 군중들을 밀치고 전중의일의 뒤를 쫓으며 자신의 단총으로 두 발을 사격하였다. 그러나 두 발 모두 전중의일의 모자를 꿰뚫었고, 김익상은 단총을 왼손에 바꾸어 쥐고 곧 폭탄을 꺼내 옆에 있던 전신주에 힘껏 부딪힌 다음 전중의일을 향해 던졌다. 그러나 폭탄은 터지지 않았다. |
1922년 3월 28일 |
상해 황포탄 홍구 공공마두(公共嗎頭) | 전중의일은 이미 자동차 안에 들어갔다. 세 번째 작전을 맡은 이종암이 군중을 헤치고 앞으로 나서며 자동차에 폭탄을 던졌다. 그러나 자동차는 곧 달리기 시작했고, 폭탄 또한 불발이었다.[32] 전중의일은 그길로 자동차를 타고 사건 현장을 빠져나갔다. 이종암은 자동차가 멀리 사라진 것을 보았을 때,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땅에 버려두고 군중 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
1922년 3월 28일 |
상해 황포탄 홍구 공공마두(公共嗎頭), 구강로, 사천로 | 김익상과 오성륜은 손에 단총을 쥔 채, 그대로 거리를 달렸다. 그 뒤를 헌병, 순경, 밀정의 무리와 일반군중까지 쫓았다. 뒤를 쫓는 무리는 점점 늘어났고, 아무 영문도 모른 채 그들이 가는 길을 막기도 하였다. 한 중국 순경이 김익상을 쫓다가 김익상이 공중에 대고 쏜 총 한 방에 놀라 쓰러졌고, 인도(印度) 순포(巡捕)는 김익상과 오성륜의 앞길을 막다가 다리 한쪽에 탄환을 맞고 넘어졌다. 그리고 영국 신문기자는 달려들어 단총을 뺏으려다가 허리에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이때 약산 김원봉은 강세우, 서상락과 함께 자전거 한 대씩을 가지고 부두 근처에서 형세를 보고 있었는데, 자전거로 도망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혼란한 상황 속 자전거를 건네주지도, 그 자전거를 타고 피신할 장소를 정하지도 못하여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단총을 휘둘러 위협하며 구강로를 지나 사천로로 달리었다. 그러나 사천로에 들어서자 그곳에서 객을 기다리고 있던 많은 황포차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탄환도, 갈 길도 없어진 두 사람은 포박을 당하였다. |
1922년 3월 28일 |
공동조계(公同租界) 공부국, 총포방(總捕房) | 김익상과 오성륜은 공동조계 공부국으로 끌려가 총포방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
1922년 3월 29일(대략 오전 10시) |
주호 일본 영사관 경찰서 | 김익상과 오성륜은 주호 일본 영사관 경찰서로 인도되었다. |
1922년 3월 29일 이후 |
주호 일본 영사관 경찰서 | 김익상과 오성륜은 각각 다른 감방에 갇히어 매일같이 심문을 받았다. 심문 중 비로소 약 반년 전 벌어졌던 총독부 폭탄투척사건의 진범이 바로 김익상인 것이 드러났다. 취조는 한 달 이상 계속되었고, 오성륜은 계획한 파옥이 성공하여 동지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익상은 그 뒤로 감시가 더욱 엄중해져 일본 장기(나가사키)로 호송되었다. |
상해대장암살사건[상해황포탄사건]의 실패한 이유
- 오성륜이 단총을 발사하는 순간, 전중의일 앞으로 지나갔던 서양인 여성과 탄환
오성륜이 타깃이었던 전중의일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순간, 서양인 여성이 전중의일과 오성륜 사이를 지나갔고 탄환은 이 여성의 가슴을 향하게 되었다. 일반 탄환이었다면 여성의 심장을 뚫고 전중의일을 향하여 갈 수도 있었겠으나 세 개의 탄환은 서양인 여성의 가슴에 박혀버렸다. 이는 탄환의 모양의 탓도 있다. 거사 전, 김원봉은 전중의일을 맞춘 탄환이 다시 그 몸을 뚫고 나가 다른 사람들을 해칠까 염려해 이날 사용하는 모든 탄환에 칼로 십자 모양을 아로새겼다. 여성의 바로 뒤 붙어 서 있었던 전중의일은 그 덕에 온전히 사건 현장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 오성륜의 오해
오성륜이 만약 자신이 전중의일을 쏘지 않았다는 것을 일찍 알았다면 기회가 있었을 것이나 일을 이루었다고 믿고 만세를 불러버렸다. 오성륜은 단총의 명수로 잘 알려진 만큼
만약 다시 기회가 있었다면 그들이 계획했던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 김익상의 사격과 전중의일의 자세
김익상도 오성륜 못지않은 단총의 명수였지만,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전중의일이 도망가며 탄환이 터질 것을 두려워하여 상체를 극도로 굽히고 뛰었다. 김익상이 쏜 두 방이 모두 전중의일의 아깝게 모자를 맞추어 전중의일은 무사히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 김익상이 던진 폭탄의 종류
김익상이 던진 폭탄이 정상적으로 터졌다면 전중의일은 중상을 입거나 사망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폭탄은 불발되었다. 이는 김익상이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했을 때 사용한 폭탄과 그 종류가 달랐기 때문이다. 일전에 사용한 폭탄은 격침을 뺀 후 던지면 폭발되는 폭탄이었다. 그러나 이날 그가 사용한 폭탄은 머리에 달린 나사 꼭지를 돌려 뺀 다음에 던져야만 비로소 위력을 발휘하는 폭탄이었다. 김익상이 이를 알고 있었으나 나사 꼭지를 돌려 뺄 겨를이 없어 자신의 완력을 믿고 전신주에 힘을 다하여 부딪치게 한 후 던졌다. 그러나 나사 꼭지를 돌려서 뽑지 않은 이상 폭발을 기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이종암이 던진 폭탄의 불발
이종암이 던진 폭탄마저 불발되었다.
상해대장암살사건[상해황포탄사건] 관련 자료
청의생활의 김익상[靑衣生活의 金益相]
...작년구월십이일 백주에 조선총독부에 폭발탄을 던지어 세상을 놀내이고 교묘한수단으로 국경을버서나서 다시중국각디를 도라다니다가 금년삼월이십팔일 상해부두에서 일본젼륙군대신전중(田中(전중))대장에게 폭탄을던지인 김익상(金益相(김익상))은 지나간 오월륙일에 상해로부터댱긔(長崎(장기))에압송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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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디지털아카이브, 『동아일보』제3면(1922년 6월 5일 발행), 「靑衣生活의 金益相」 |
쾌활히 범행을 인정[快活히 犯行을 認定]
김익상에 대한 검사 심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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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디지털아카이브, 『동아일보』제3면(1922년 6월 8일 발행), 「快活히 犯行을 認定」 |
김익상은 무기징역[金益相은 無期懲役]
이십오일댱긔에서판결언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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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동아디지털아카이브, 『동아일보』제3면(1922년 9월 27일 발행), 「金益相은 無期懲役」 |
참고문헌
- 박태원, 『약산과 의열단』, 깊은샘(2000)
- 동아디지털아카이브, 『동아일보』
주석
- ↑ "김익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익상",
『나무위키』online , 위키피디아. - ↑ "김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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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최수봉의 이명
- ↑ "이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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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online , 위키피디아. - ↑ "이종암",
『나무위키』online , 위키피디아. - ↑ "이종암",
『나무위키』online , 위키피디아. - ↑ 일본어식으로 읽으면 '다나까 기이찌'임
- ↑ 이종암, 김익상 두 인물이 양보하지 않았는데, 그중 김익상이 특히 그러하였다고 한다.
- ↑ 이종암이 던진 폭탄은 마침 그곳에 있었던 미국 해병이 발로 차 바다에 넣었다고 한다.
- ↑ 「靑衣生活의 金益相」, 『동아일보, 1922년 6월 5일,
『동아디지털아카이브』online , 동아일보. - ↑ 「快活히 犯行을 認定」, 『동아일보, 1922년 6월 8일,
『동아디지털아카이브』online , 동아일보. - ↑ 「金益相은 無期懲役」, 『동아일보, 1922년 9월 27일,
『동아디지털아카이브』online ,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