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치품
개요
사치품에는 어떠한 물품들이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 경성기의 사치품 구매가 의미하는 바를 파악해보고자 한다.
내용
1930년대 사치품
우월적본능이 강한사람은 물품을 소유하는데도 남의것보다나은 것을 가지려고 한다 어떤 여자는 제일 처음으로나온 유행복을남보다 먼저사서닙는것으로써 쾌감을 느낀다. 또 어떤사람은 남이아직 쓰지못한 최신식모자를 사서쓰고 만족해한다 이런사삼들은다른사삼보다 좀 특수한 것을 닙고좀뛰어나는 것을 쓰겟다고 하는 동기에서 상품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평범하고 검소한것보다도 특수하고 사치한 것을 숭배하는편이많다. |
||
출처: 「광고와 소비자구매동기(二)」, 『동아일보』, 1933.12.19 |
과시적 소비는 자신이 특정한 사회계급에 속해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부를 과시할 목적으로 의식하면서 행하는 소비를 말한다. T.베블런(Veblen)이 처음으로 사용했다.[1]이는 상류층에서 빈곤층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에서 발생한다. 고가의 사치품들을 판매하는 백화점은 과시적 소비의 대표적인 공간이다. 백화점의 전성시대라고 불리는 1930년대의 경성에서 역시 사치품은 근대성과 사회적 계층의 상징적 기제로 작동하였다. 물론 과시적 소비는 경성기 이전부터 존재하였으나 신분 사회에서 생득적으로 계급을 세습했던 것과는 달리, 근대 사회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근대 이전에눈 신분제로 인한 계급의 차이에 따라 소비가 결정되었다면, 근대에 이르러서는 소비가 계급을 구별하는 수단이 된 것이다.
대표적인 사치품으로는 핸드백, 여우목도리, 귀금속, 금시계 등이 있었다. 가죽에도 계급이 있다며 '타조·아스로라칸 악어등의 가죽', '도마뱀·뱀·양가죽','상어카-푸(송아지가죽)','도야지가죽' [2]의 순으로 구별하고, 사체의 여우 목도리를 한 여자로서 회색빗의 은호피 목도리를 둘렀다면 소위 귀부인의 명칭을[3] 얻을 수 있으며 개가죽으로 만든 목도리는 거리의 여우 목도리를 더 자세히 보이게[4]만든다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치품의 가격이 높을수록 개인의 지위 역시 상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외국 물건에 대한 수입 규제가 나타나자, 그 종목 대부분이 사치품으로 기생아씨가 '코티'를 잃어버리게되고 모던보이가 '콘탁트'를 염두에 못 두게 되고 부유한 신사가 '쪼사리노' 모자를 못 쓰게 되고 미국제 시계가 아니면 시계로 알지 않든 계급에서는 상당한 공황이[5]생겼고, 멋쟁이 모던보이, 모던걸, 구미식 생활의 신사등 각층 인사들도 이제는 할수 없이 국산품으로 만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형편이[6] 되었다. 이를 통해 '사치품', 특히 '수입 사치품'의 구매가 '모던', '신사', '귀부인' 등의 사회적 지위를 부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수입 사치품에 대해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1876년, 조선 조정이 일본을 시작으로 미국, 청凊 및 유럽 국가들과 통상조약을 맺으면서 서울과 인천 등에는 ‘양행洋行’이나 ‘상회商會’와 같은 이름을 한, 무역회사들이 세워졌다. 인천 제물포와 서울 회동에 지점을 개설한 독일계 회사인 세창양행世昌洋行; Meyer & Co.이나, 마찬가지로 인천에 설립된 미국계의 타운센트 상회陀雲仙商會; Townsend Co. 등이 그 예다.
이들은 외국의 여러 상품을 수입하여 판매하고, 조선의 산물을 수출하면서 성장했다.[7] 이러한 수입품들은 '박래품'이라고 불리었는데, '舶來品', '큰 배에서 온 물품'이라는 뜻이다. 일제강점기 초기인 1920년 관세 인상과 관련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보면 이에 대해 ‘모양 있고, 쓰기 좋고, 튼튼한, 서양 사람의 손으로 만든’ 상품이라 하면서 일본산 수입품들과 구분 짓고 있다. 박래품은 ‘서양’에서 수입된, 갖고 싶을 만큼 좋은 특별한 상품들이었던 것이다. 초창기,‘물 건너온’ 세련된 서양 상품의 상당수는 왕실이나 특별히 부유한 사람들이 누리는 사치품이자, 자신들의 사회적인 영향력을 과시하는 일종의 위세품이었다. 가격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8] 박래품의 종류로는 시계, 양복, 양산, 향수, 석유 등이었으며, 일반 대중들은 실물을 보고 이름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광고를 통해 아는 경우가 많았다. 또, 외국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수입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일본을 통해 간접적으로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시간이 흘러, 일반 대중들도 일상 생활용품으로서 박래품을 사용하였으나, 국내산보다는 훨씬 더 비싼값에 팔렸다. 1930년대에 들어서, 모던 세대들은 수입 의류 소비를 통해 과시성을 드러냈다. 양복이나 양장 원단, 패션 관련 상품들의 대부분은 수입품이었다. 각 상품은 그냥 시계 혹은 금시계가 아니라 영국제 센손, 베넷트, 서서의 파섹크, 인터내슈낼, 론진, 미국의 월삼, 엘진, 하-봐드, 하밀튼(숙녀비망첩, 1933) 등과 같이 구체적인 브랜드로 등장하였다. 대유행이었던 털실도 영국제와 일본제 비하이부, 국인, 보다니와 같은 수입 브랜드 제품이 인기를 끌었다. [9]
식민치하의 현실과 모순되는 사치품의 소비는 비판의 대상이 될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담론은 모던 세대들을, 특히 모던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의대표적 도시에굼벵이보금자리가튼 쓰러진초가집이거 지반인데도- 그리고 대학졸업생 거지 반이취직을못하야거리로 방황하는 여긔에녀자들은치마한감에 삼사십원양말한켜레에 삼사원손가락에 인것만해도 이삼백원머리에 진것만해도 오륙백원얼골에칠하는것중에분갑만해도아츰분낫분밤분해서 사 오원 머리만지지는대도일이원이라하고 초가집을나서서는오든길을 가고가든길을돌처서서 대활보로거러가는것이 소위요사이모던 - 이다 |
||
출처: 「어듸서그돈이생길가」, 『조선일보』, 1930.04.08, |
도회의 녀성이 털보되는때다 여호털,개털쇠털,털이면조리고목에다 두르고실로나운다구렝이도털이잇다면 구렝이가죽도목에다 물럿슬가 |
||
출처: 「가두풍경『털시대』」, 『조선일보』, 1932.11.24, |
소비세대가 형성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토대가 기반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1920, 30년대 조선에서 재화와 서비스를 구입하고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집단은 매우 적었다. 이러한 소비문화는 한국 전역이 아닌, '경성'이라는 지역에 국한되어 있으며, 소비문화 주체 역시 극소수의 일부 집단이었다는 점을 유의하여야 한다.
참고문헌
논문
- 김은정·윤태영·고수진·고애란,「한국 근대 소비문화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특성에 관한 연구 -복식과 관련된 소비를 중심으로-」,『한국의류학회지』34(11), 한국의류학회, 2010, 1786-1797.
- 박혜원,「한국 근대 문화 소비 주체로서 모던 신세대의 가치관, 소비문화, 의복 태도 특성: 1920년대∼1930년대를 중심으로」,『대한가족학회지』49(9), 대한가족학회, 2011, 99-109.
- 진혜은, 「기능소비와 상징소비에 대한 사적 고찰 -조선시대와 근대화기를 중심으로」,『소비자학연구』18(2), 한국소비자학회, 2007, 79-101.
웹사이트
주석
- ↑ pmg 지식엔진연구소, "과시적 소비"
『박문각』online , 박문각. 온라인 참조: "과시적 소비",시사상식사전『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네이버. - ↑ 「가죽의 종류와등급도 여러가치며여러칭」, 『조선일보』, 1937.10.26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색연필」, 『조선일보』, 1939.12.04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위 기사, 『조선일보』, 1939.12.04
- ↑ 「경계를요하는 대용품의 폭등」, 『조선일보』, 1937.10.08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전시경제진본격화 박래품당 대통봉 수입금지품삼백여종」, 『조선일보』, 1937.10.08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online , 네이버. - ↑ 최효찬, "바다 건너 배를 타고 전해진 상품, 박래품", (인천,)
『민속소식 신축년 육월』online , 국립민속박물관. - ↑ 최효찬, 위 글
- ↑ 박혜원,「한국 근대 문화 소비 주체로서 모던 신세대의 가치관, 소비문화, 의복 태도 특성: 1920년대∼1930년대를 중심으로」,『대한가족학회지』49(9), 대한가족학회, 2011, 99-109.
기여
- KSH21KHU : 최초 작성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