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작품 속 우미관과 영화 '명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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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우미관은 일본인이 조선인을 상대로 지은 영화관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장편영화가 등장하면서 영화를 상영할 때 영화에 대해 소개해주는 역할인 '변사'가 있는데, 우미관에는 이 변사를 오직 조선인 변사만 두어 일본인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조선인들을 위해 이 영화관을 운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 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 소설에는 우미관에서 <명금>이 상영되었을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종종 등장하기도 한다.[2] 이런 맥락에서 우미관과 그곳에서 방영된 영화 <명금>이 소설 속에 어떻게 녹아들어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은 한국문화예술 교육적으로 의미가 크다.

내용

우미관의 모습

서울역사아카이브:우미관의 모습

관철정 89((貫鐵町 89, 현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한 우미관(優美館)의 모습이다.[3]

우미관 프로그램

1930년대 이전까지 상설관은 평일 1회, 주말이나 휴일의 경우 2회 상영이 원칙이었다. 그래서 평일의 경우는 7시 즈음에 영화상영이 시작되었으며 휴일의 경우에는 낮에 한 번의 상영이 더 있었다. 그런데 1930년대 중반부터 평일에도 3회씩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한다. 이는 지금과 같은 하루에 여러 횟수의 상영이 처음으로 제도화 된 것이었다. 평일 3회 상영이 실시될 당시 영화시작 시간은 상설관 마다 조금씩 달랐다. 우미관에서는 오전 11시, 오후 3시, 저녁 7시에 맞춰 총 3회의 상영을 했다. 1934년 이후 상설관 프로그램의 또 다른 특이점으로 일본영화가 프로그램 목록에서 발견된다는 점이다. 특히 우미관은 일본영화를 본격적으로 상영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영화 상영의 직접적인 계기는 1934년 시행된 활동사진영화취체규칙 으로 모든 상설관에서는 의무적으로 일정한 양의 국산영화를 상영토록 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조선인상설관은 양화관으로만 운영되어 일본영화를 상영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미관이 여타의 상설관들 보다 훨씬 많은 일본영화를 상영한 것은 왜일까? 이는 시설과 재정이 열악한 우미관에서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의 일본영화로 프로그램을 채웠기 때문에 그랬다.[4]

우미관 운영방식


조선인을 상대로 사업을 하던 두 일본인, 하야시다 긴지로와 시바타 미요지가 조선인을 상대로 한 영화관을 만들기로 하고 조선인 상권의 중심인 관철동, 즉 종로 2가에 우미관을 세운다. 일본인 관객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조선인 관객들만 고려하여 오직 조선인 변사만 두었다. 1910년을 전후하여 영화가 장편영화로 전환이 되었고, 이에 따라 전설만 있으면 관객들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런 설명 없이 영화를 보게 된다. 가령 외국 영화를 상영할 경우 영화에 대한 설명이 없이 영화를 관람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영화에 대해 소개를 해주는 변사가 필요한데, 조선인 관객들만 받겠다는 취지로 변사를 조선인만 둔 것이다. [5]

문학작품 속 우미관의 상영영화 '명금'


영화 '명금' 포스터


이광수의 '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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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서늘하다. 종로 야시에는 '싸구려'하는 물건 파는 소리와 기다란 칼을 내두르며 약 광고하는 소리도 들린다. (중략) 아직도 장옷을 쓴 부인이 계집아이에게 등불을 들리고 다니는 이도 있다. 우미관에서는 무슨 소위 '대활극'을 하는지 서양 음악대의 소요한 소리가 들리고 청년회관 이층에서는 알굴리기를 하는지 쾌활하게 왔다 갔다 하는 청년들의 그림자가 얼른얼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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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광수, '무정'>


당시 매일신보 광고를 살펴보면, 1916년 6월 말 우미관의 주요 상영 프로그램은 23일부터 개봉된 '세계적 모험 탐정 대활극' 연속영화 <명금>(The Broken Coin,1915)이었다. 뉴욕의 탐정 소설가 키티 그레이(Kitty Gray)가 유럽 고대 왕국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파란만장한 모험을 펼치는 영화 <명금>은 미국 유니버셜사가 총 22편 44권으로 제작한 연속영화로서, 1910년대 후반 미국발 활동사진 열풍을 불러 일으키며 우미관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장식한 흥행작이었다. 우미관은 1916년 개봉 이래 <명금>을 여러 차례 재상영했고, '명금 대회'라는 이름의 상영 행사를 열어 많은 관객들을 유인했다. [6]

박태원의 '오월의 훈풍'


박태원의 <오월의 훈풍>에는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수전동 골목 아이들이 우미관에서 본 영화를 흉내내며 '명금 놀이'를 하는 모습을 회고하는 대목이 있다. 아이들은 각자 <명금>에 나오는 인물-'기지꾸레','싸치오 백작','후레데리꾸 백작','로로'-이 되어 골목길을 누빈다. 이렇게 한국 근대 소설에는 우미관에서 <명금>이 상영되었을 당시를 회고하는 대목이 종종 등장한다. [7]

참고문헌


주석

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