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 4.19 민주 묘지
목차
개요
자유당 정권의 부정 부패와 독재,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기 위해 일어난 4.19혁명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추모시설이다.
내용
발생원인
1948년 8월 15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은 1950년,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동족상잔의 피 비린내 나는 6·25전쟁을 겪어야 했으며, 3년에 걸친 전쟁으로 우리 국토는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생겨났으며, 우리 경제는 자생력을 잃고 외국의 원조에 의존함으로써 물가는 자꾸 오르기만 하였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나 국가를 재건하고 국가경제를 일으켜야 할 이승만 자유당 정권은 자신들의 장기집권을 꾀하며 부산 정치파동, 사사오입 개헌, 반대세력에 대한 폭력 등 온 갖 정치적 부정과 탄압을 일삼았다.
이승만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이 1956년 민의원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자 이에 불안해진 자유당은 1960년 3월 15일에 있을 정·부통령 선거를 대비해 선거 1년 전부터 대대적인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1]
전개
대구2.28학생의거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개최될 민주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등교시켜 영화관람, 토끼사냥 등에 동원하자 대구지역 고교생들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거센 항의 시위를 벌였다. 2·28대구학생의거는 불의와 부정선거에 대한 최초의 항거로 4·19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3.15부정선거
1960년 3월 15일, 마침내 정·부통령 선거 날이 밝았다. 이 날은 장기집권을 꿈꾸는 이승만과 그의 갑작스런 유고시 뒤를 이을 자유당 부통령 후보 이기붕의 예정된 승리의 날이었다. 3·15선거는 사상유례 없는 다음과 같은 추악하고 불법적인 부정선거로 얼룩졌다.
마산3.15의거
민주당 마산지부의 선거무효 선언과 함께 시작된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이승만 정부는 무차별 진압에 나섰고 마산에서는 경찰의 사격으로 학생과 시민이 쓰러졌다.무고한 시민, 학생의 죽음을 공산당의 책동으로 무마하려고 애쓰던 이 무렵, 마산시 중앙부두 앞바다에 눈에 최루탄이 박힌 소년의 시체 한 구가 떠올랐다.
3월 15일 부정선거 항의시위에 참가했던 김주열군이 실종 20여일 만에 참혹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분노한 마산시민들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진실규명은 외면한 채 무고한 시민들을 연행·검거하였고, 이에 자유당의 만행을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결과
이후 고려대생 3천여명 시위 등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4월 26일 이승만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했다.4월 26일 새로 지명된 외무부장관 허정과, 계엄사령관 송요찬, 그리고 주한 미국 대사였던 맥카나기(Macanarghy,D.P.)의 충고를 받아들여, 이승만은 대통령·부통령의 선거가 새로 실시될 것이고, 헌법도 대통령 중심제에서 의원 내각제로 바꾸어질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승만정권의 붕괴는 경찰력에 의하여 유지되었던 정치권력이 학생들이 선봉에 선 반경찰·반관료적 대중에 굴복하였음을 의미한다.[2]
영향
4·19혁명의 결과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집권여당인 자유당이 몰락하였으며,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내각책임제 개헌에 의한 7·29총선으로 장면(張勉)을 국무총리로 한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3]
관련영상
참고문헌
민주화운동사』
4·19혁명(四一九革命)』
국립4.19민주묘지』
주석
- ↑ 국립4.19민주묘지』
online , 국립4.19민주묘지 - ↑ 4·19혁명(四一九革命)』
online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 민주화운동사』
online , 창원특례시.
기여
- AGM22KU: 최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