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

"영월 장릉"의 두 판 사이의 차이

Heritage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영문 해설 내용)
(영문 해설 내용)
41번째 줄: 41번째 줄:
 
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의 능이다.  
 
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의 능이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숙부인 수양대군(후의 세조, 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이듬해 단종의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처형되었고, 1457년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고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당시 영월의 향리였던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16세기 들어 단종의 묘를 정비하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의견이 조정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봉분을 정비하고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  
+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숙부인 수양대군(후의 세조, 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이듬해 단종의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처형되었고, 1457년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고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당시 영월의 향리였던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16세기 들어 단종의 묘를 정비하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의견이 조정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봉분을 정비하고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석물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조선 전기에 조성된 왕릉의 장명등은 일반적으로 팔각지붕형인데, 장릉에서는 처음으로 사각지붕형 장명등이 만들어졌다. 특히 장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석물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조선 전기에 조성된 왕릉의 장명등은 일반적으로 팔각지붕형인데, 장릉에서는 처음으로 사각지붕형 장명등이 만들어졌다. 특히 장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2024년 3월 4일 (월) 14:17 판


영월 장릉
Jangneung Royal Tomb, Yeongwol
영월 장릉,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대표명칭 영월 장릉
영문명칭 Jangneung Royal Tomb, Yeongwol
한자 寧越 莊陵
주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영흥리)
지정번호 사적 제196호
지정일 1970년 5월 26일
분류 유적건조물/무덤/왕실무덤/조선시대
시대 조선시대
수량/면적 3,562,821㎡
웹사이트 영월 장릉, 국가문화유산포털, 문화재청.



장릉배치도.jpg.png

해설문

국문

조선 6대 임금 단종(1452∼1455 재위)의 능이다.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계획이 밝혀져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단종이 죽자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월 호장 엄흥도가 장사를 지냈다. 중종 이후 조정에서 단종의 제사와 무덤에 관한 의견이 나오게 되어, 선조 때에 이르러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을 세웠다. 노산군으로 지위가 낮아졌던 단종은 숙종 7년(1681)에 노산대군이 되었고, 숙종 24년(1698)에 복위되어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였다.

무덤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다. 능은 간단하고 작은 후릉(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의 양식을 따라 석물은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명릉(숙종과 인현왕후‧인원왕후의 능) 이래 만들어진 사각지붕형 장명등은 장릉에서 첫선을 보였다.

특히 장릉은 무덤 제도로 정해진 것 외에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시는 건물인 배식단사를 설치하였다. 조선왕릉 중 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이곳뿐이며, 모두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2009년에는 영월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가 능원 공간의 조형 형식 변화와 산릉제례를 오늘날까지 이어 온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영문

영문 해설 내용

장릉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의 능이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으나 숙부인 수양대군(후의 세조, 재위 1455-1468)에게 왕위를 빼앗겼다. 이듬해 단종의 충신들이 그를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 모의하다가 적발되어 처형되었고, 1457년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고 후환이 두려워 시신을 거두는 사람이 없었는데, 당시 영월의 향리였던 엄흥도가 시신을 수습하여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16세기 들어 단종의 묘를 정비하고 제사를 지내야 한다는 의견이 조정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여 봉분을 정비하고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다.

능의 양식은 간단하고 석물도 왜소하면서도 간단한 편이다. 조선 전기에 조성된 왕릉의 장명등은 일반적으로 팔각지붕형인데, 장릉에서는 처음으로 사각지붕형 장명등이 만들어졌다. 특히 장릉에는 다른 왕릉과는 달리 단종에게 충절을 다한 신하들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과 그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장릉을 포함한 조선왕릉 40기는 왕실 무덤 형식의 변화를 보여주고 규범화된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온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개별안내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