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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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임진왜란 때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 진주(晉州)에서 조선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싸움. 1차 진주성싸움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리운다.

조선시대 진주는 경상도 일대를 관장하는 가장 큰 고을로 고려시대부터 남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들을 방어하는 기지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승승장구하며 평양까지 진격한 왜군은 군량미 보급을 위하여 곡창지대인 호남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바닷길에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가로 막힌 왜군은 육로상 호남으로 가는 길목인 진주성을 차지하기 위해 임진왜란 최대의 격전을 벌이게 된다.

제1차 진주성 싸움

1592년(선조 25) 10월5일부터 10월 10일까지 벌어진 전투로, 당시 진주성은 진주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지휘한 3,800명의 조선군이 왜군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고 일반 양민 약 2만 명이 진주성 내에 있었다. 진주성은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에는 절벽으로 가로 막힌 천혜의 요새로, 조선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왜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방어 전술을 펼쳤다.

하세가와 히데카즈(長谷川秀一), 나가오카 다다오키(長岡忠興), 기무라 시게코레(木村重玆) 등이 이끄는 왜군 약 2만 명은 수 천개의 대나무 사다리를 만들어 진주성을 공격하였다. 김시민은 화약을 장치한 대기전(大岐箭)을 쏘게하여 성벽을 기어오르는 왜군의 대나무 사다리를 파괴하고, 마른 갈대에 화약을 싸서 던지거나 끓는 물과 큰 돌을 던지는 등 왜군을 물리쳤다. 병력과 무기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10배에 이르는 왜군의 공세를 분쇄하였다. 왜군은 6일간의 대접전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10월 10일에 패주였으나, 전투를 지휘한 진주목사 김시민은 이마에 총상을 입어 그해 11월 22일에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정유경, 김준민 등의 의병군들은 외곽에서 적군을 위협하는 협공작전을 펼쳣다. 이 싸움의 승리로 다른 경상도 지역을 보존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으로 하여금 호남지방을 넘보지 못하게 하였다. [1]

제2차 진주성 싸움

제1차 싸움에서 참패로 왜군은 1593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등이 진주성을 재차 공격하였다. 당시 명나라와 화의를 진행중이던 왜군은 경상도와 호남지역을 장악하여 후방의 안정적인 보급과 확실한 교두보로 만든 후 강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차지하는 전략적인 중요성이 증대되어 반드시 진주성을 공략해야만 했다. 왜군은 6월 15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18일까지 함안(咸安)·반성(班城)·의령(宜寧)을 점령하고, 19일 9만 3000명의 병력이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진주성에는 진주목사 서예원 휘하의 2400명과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경상우병사(右兵使) 최경회(崔慶會), 충청병사 황진(黃進), 사천현감(泗川縣監) 장윤(張潤), 거제현령 김준민, 의병장 고종후(高從厚)과 이계련(李繼璉), 태인 의병장 민여운(閔汝雲), 순천 의병장 강희열(姜希悅), 김해부사 이종인(李宗仁), 등이 이끄는 의병들이 포진하였다. 진주성에 집결하여 수성을 맡은 병사는 약 6000~7000명의 병력과 약 6만 명의 일반민들이 있었다. [2]

그러나, 당시 진주목사 서예원(徐禮元)은 원병으로 와있던 명나라 장수를 상주에서 접대하다가 급히 전투에 참가하느라 진주성을 지휘할 채비를 갖추지 못하였고 진주성 전체의 지휘는 의병장 김천일이 맡게 되어 지휘체제에 혼선이 있었다. 더욱이 진주성 안의 관군,의병,주민 모두 의기로 뭉쳤을 뿐 잘 훈련된 왜군에 대항하기는 처음부터 열세적인 입장에 있었다. [3]

싸움은 6월 22일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산발적으로 공격하던 왜군은 번번히 패퇴하였다. 황진과 이종인, 김천일, 김준민, 장윤 등이 분전하여 왜군의 파상공격을 거듭하여 막아내었지만,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거의 모든 장병이 전사하고, 29일에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성안에 남은 군관민 6만 명을 사창(司倉)의 창고에 몰아넣고 모두 불태워 학살하였고 가축도 모두 도살하였다. 이 싸움은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전투 가운데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데, 비록 싸움에는 패하였으나 왜군도 막대한 손상을 입어 호남으로 진출할 수가 없었다. [4]

한글고문헌과의 연관성

학봉 유서와 관련하여

1592년 4월 11일, 선조유서김성일에게 내리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하였다. 이미 2개월 전부터 선조신립이일을 보내어 각도의 방비를 엄하게 하였다. [5] 외지의 성을 쌓는 것 뿐만 아니라 내지에도 성을 쌓으니 민심이 크게 흉흉하였다. 이 문제를 김성일이 제기하면서, 민심을 위해 공사를 중단하기를 청하자 오히려 선조는 그를 병마절도사에 임명하여 남쪽으로 내려보낸 것이다. [6]

그리고 3일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고, 김성일은 임지로 가다가 방향을 바꾸어 경상남도 창원으로 향했다. 거기서 모은 병력으로 왜군 선봉대와 싸워 물리쳤다. 하지만 선조김성일이 "왜군이 처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란 언급을 문제 삼아 그를 잡아 오라고 명령을 내렸다. 김성일은 명을 받들어 한양으로 돌아오다가, 가는 길에서 다시 초유사로 임명한다는 선조의 명령서를 받았다. 그는 즉시 다시 길을 돌려서 임지로 내려갔고, 임지로 내려가는 도중에 도망치는 군사나 수령을 다독거려 방비를 엄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상남도 함양에 이르러 초유문(招諭文)을 지어 도내에 포고(布告)하였다. 1592년 7월 당시 김성일은 도내(道內)를 돌면서 여러 군읍(郡邑)의 병사를 정돈하고 싸움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창원(昌原)에 있던 왜적이 진주에 방비가 없음을 알고는 진해에 있는 왜적과 서로 호응하면서 크게 쳐들어와 노략하였다. 이에 김성일은 급히 단성(丹城)으로 가서 함양 등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두 동원해 진주로 달려간 다음, 김시민(金時敏)에게 명령하여 진주성을 굳게 지키게 하였다. 이때 곽재우가 먼저 성에 들어가 있어서 군대의 위세가 자못 왕성하였으므로, 왜적들이 남강(南江)까지 와서는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상황에서 김성일과 여러 장수들의 병력이 덮치자 왜적들은 대패하여 밤에 도망쳤다. 그리고 이전에 점령되었던 사천(泗川), 진해(鎭海), 고성(固城) 3 고을을 회복하였다. [7]

그러나 한달 후 선조김성일을 경상좌도사로 임명 하였다. 이 임명장을 받은 김성일은 바로 임지로 나아갔고, 경상우도 사람들이 붙잡았지만 명령을 어길 수 없다 하여 임지로 나아갔다. 하지만 의병 관련 일은 김성일이 초반부터 관리하였음으로 경상좌도사로 임명되었어도 지속적으로 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경상우도 의사(義士)들이 선조에게 상소를 넣어 김성일을 경상우도 관찰사로 돌아오기를 원하자 선조는 다시 명령을 내려 1592년 9월 다시 그를 경상우도 관찰사로 임명하였다. [8]

김성일은 다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된 이후 이전처럼 왜적 방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김성일이 좌도절도사로 간다는 말을 들은 많은 의병과 의사들이 흩어져 방비에 어려움이 있었다. 이제 김성일은 임시방편으로 자신의 직함을 이용하여 주요 지역에 수령을 임명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군령을 엄하게 하고 다시 처들어올 왜적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10월, 김성일은 산음(山陰)에 있었는데 창원(昌原)의 왜적이 부산(釜山), 김해(金海)의 왜적과 합세하여 수만 명의 무리를 모아 진주성 에서의 패배를 보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때 김시민이 목사로 승진하였고, 김성일은 그를 치하 하면서도 진주성을 굳게 지키게 하라 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은 말을 달려 의령으로 가 여러 장수들에게 합심해서 왜적을 제압하라고 독려 하였다. 이때 왜적은 이미 진주성을 열 겹으로 에워쌌으며, 대오가 수십 리에 걸쳐서 뻗쳐 있었다. 이에 김성일은 결사대를 모집하여 활과 화살을 많이 준 다음 밤을 틈타 남강(南江)의 허술한 곳을 통해서 성 안으로 숨어 들어가게 해 장수와 사졸들을 격려하여 죽음으로써 지키게 하였으며, 첩자를 많이 보내 왜적의 정세를 정탐하게 하였다. 또 호남에 통문을 보내어 호남의 의병도 와서 살천(薩川)에 진을 쳐 형세를 돕게 하였다. 김시민은 일체 명령대로 따라 계책을 내고 복병을 숨겨서 응전하였다. 왜적들이 7일 밤낮을 계속하여 공격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그들의 막사를 불태우고 쌓여 있는 시체를 태워버린 다음 도망하였다. 진주성 싸움에서 이긴 후 김성일은 곧바로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인심을 안정시켰다. 군교(軍校)들이 들어와 치하하면서 승전한 공을 대부분 김성일에게 돌리자, 선생은 이르기를, “이것은 목사와 여러 장수들의 힘이다. 머리가 허연 썩은 선비가 무슨 공이 있겠는가.” 하고서, 왜적을 섬멸하여 공을 세우라고 면려한 다음 즉시 공을 세운 데 대해 표창하라는 계문을 올림으로 인해 김시민이 병사로 승진되었다. [9]

진주성 전투 이후 경상남도 지역은 기근이 들었다. 이에 김성일은 조정에 보고하고 여러 고을에 명령을 내어 구휼미를 풀었다. 그리고 워낙 김성일 자신이 철저한 사람이라 큰일부터 아랫일까지 항상 감독하여 날을 세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결국 소갈증이란 병(당뇨병)을 얻게 되었다. [10] 그런 상황에서 1593년에 이르렀어도 기근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3월에 이르러서는 역병이 돌았다. 그 뿐만 아니라 김시민이 병사(病死)했다. 그리고 몸이 약해진 김성일은 계속해서 군무와 민정을 담당하다가 4월 29일 진주 공관에서 사망하였다. [11]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1차 진주성싸움(1592년10월5일~10월10일)에서 3800명의 군사와 2만명의 백성이 2만여명의 왜군을 물리쳤으나, 다음해 1593년 2차 진주성싸움에서는 성이 함락되고 10만여명의 왜군에 맞서 싸운 군관민 6만여명이 학살당하였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노드 관계 노드
진주성싸움 ~에서 발발하였다 진주성
김시민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김성일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이광악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성수경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곽재우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최경회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정기룡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김시민 ~에 배향되었다 창열사
비격진천뢰 ~에서 사용되었다 진주성싸움
질려포통 ~에서 사용되었다 진주성싸움

시각자료

사진

주석

  1.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대첩'
  2.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대첩'
  3.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제2차 진주성전투'
  4. 네이버 지식백과, '진주대첩'
  5.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2월 1일(임진) 1번째 기사 (온라인 참조: 대장 신입과 이일을 각도에 보내 병비를 순시케 하다, 『조선왕조실록』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최종확인: 2017년 04월 22일 )
  6. 『학봉전집』,「학봉집 부록」1권, 연보, 만력 25년(1592), 4월 11일 (온라인 참조: 정선용, 연보(年譜) , 『한국고전종합 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2일)
  7. 『학봉전집』,「학봉집 부록」1권, 연보, 만력 25년(1592), 7월 (온라인 참조: 정선용, 연보(年譜) , 『한국고전종합 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2일)
  8. 『학봉전집』,「학봉집 부록」1권, 연보, 만력 25년(1592), 9월 4일 (온라인 참조: 정선용, 연보(年譜) , 『한국고전종합 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2일)
  9. 『학봉전집』,「학봉집 부록」1권, 연보, 만력 25년(1592), 10월 (온라인 참조: 정선용, 연보(年譜) , 『한국고전종합 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2일)
  10. 『학봉전집』,「학봉집 부록」1권, 연보, 만력 25년(1592), 12월 (온라인 참조: 정선용, 연보(年譜) , 『한국고전종합 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2일)
  11. 『학봉전집』,「학봉집 부록」1권, 연보, 만력 26년(1593), 4월 29일 (온라인 참조: 정선용, 연보(年譜) , 『한국고전종합 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최종확인: 2017년 04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