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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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계수(季綏), 호는 망우당(忘憂堂)이다

1585년(선조 18) 별시(別試) 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파방(罷榜)되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거름강)에 강사(江舍)를 짓고 은거 생활을 하였으나,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義州)로 피난하자 같은 달 22일 의령에서 2천여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5월에는 함안군을 수복하고 정암진(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때 홍의(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조정에서는 이 공을 인정하여 그해 7월 유곡찰방(幽谷察訪)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형조정랑을 제수하였다. 10월에는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진하여 조방장(助防將)을 겸임하다가 성주목사(星州牧使)에 임명되어 악견산성(岳堅山城) 등 성지를 수축하였다. 또한 1차 진주성전투에 휘하의 병사들을 보내어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승리하는데 조력하였다.

1595년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수비하여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군을 맞아 싸웠다. 이후 계모의 상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창암진(蒼巖津) 강가에 망우정(忘憂亭)을 짓고 은둔하고 있다가 1604년(선조 37) 찰리사(察理使)에 임명되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을 보수하였고, 10월에는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嘉善大夫龍驤衛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또 다시 낙향하였다가 1610년(광해군 2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을 역임하였고, 이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12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린 후에 다시는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1]

사후에 그의 사우(祠宇)에‘예연서원(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고,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가 추증되었다. 묘지는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다. [2]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임진왜란 초기 정암진(鼎巖津)에서 왜군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둠으로써 경상우도를 보존하고, 왜군의 진로를 차단하여 곡창지대인 호남 진출을 저지할 수 있었다. 또한, 군수물자와 병력을 운반하는 적을 기습하여 적의 통로를 차단하는 데 성공하였으며, 1592년 10월에 있었던 김시민의 진주성전투에는 휘하의 의병을 보내서 왜군을 후반을 위협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기여하였다. [3]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곽재우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참고

  1. 네이버 지식백과, '곽재우'
  2. 네이버 지식백과, '곽재우'
  3. 문화원형백과, 곽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