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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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아버지는 군수 호약(好約)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영남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여 대비하였다. 그 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고립되고 대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성안에 들어가 김시민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을 격퇴시켰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 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그 후 100여 전투에 참전하여 선봉에서 싸워 용맹을 날렸으며 특히 활을 잘 쏘아 화살 하나에 반드시 3,4명을 죽였다고 한다.

그 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1]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진주성싸움에서 김시민 장군이 적의 탄환에 이마를 맞아 부상을 당하자 그를 대신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여 왜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었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이광악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참고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광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