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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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본관은 안동, 자는 면오(勉吾),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고려 때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13대손이자 지평(持平) 김충갑(金忠甲)의 아들로 1554년(명종 9)년 충청도 목천현(木川, 천안시 병천면 가전리)에서 출생하였다.

1578년(25세)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판관(判官)을 제수받았고, 1583년 여진 출신 니탕개(尼湯介)가 두만강을 넘어 쳐들어 오자 황해도 순찰사 정언신의 지휘하에서 신립, 이순신 등과 함께 공을 세워, 군기시(軍器侍) 판관으로 재임하다 병기 및 군사훈련에 관하여 토론하다 건의사항이 채택되지 않자 병조판서와 갈등을 빚고 사직하였다. 그 후 다시 훈련원 군기시(軍器侍) 판관으로 복관되었다. 당파와 이해관계를 갖지 않아 정치적으로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진주목사직을 대리하였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수축,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1]

그해 6~7월 사천, 고성, 진해에 주둔하는 왜군을 공격하여 무찌른 공로로 진주목사(晋州牧使)가 되었다(8월). 9월에는 적장 평소태(平小泰)를 사로잡는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10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道使)를 제수받았다. 10월에 왜군이 대대적으로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당시 진주성을 지키고 있던 그는 3,800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탁월한 용병술과 전략전술로 적장 하세가와(長谷川秀一)가 이끄는 2만의 군대를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제1차 진주성 전투).

의병장 곽재우 최경회 등이 적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도움을 받아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장군이 진주성 안에서의 전체적인 지위를 이끌었다. 10월 5일부터 11일까지 계속된 이 전투에서 마지막 날 적의 대대적인 총공세를 맞아 적의 세력을 진압하였다. 하지만 성 내부를 순찰하던 중 쓰러진 적군이 쏜 탄환을 이마에 맞아 부상을 당해 치료를 하였으나, 10월 18일 3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1592년).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2]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인 1차 진주성싸움(1592년10월5일~10월10일)에서 군관민을 지휘하여 3800명의 군사로 2만여명의 왜군을 물리쳤으나, 후퇴하는 적의 탄환에 이마를 맞아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두었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관계 노드
김시민 ~에 참전하였다 진주성싸움


참고

  1. 네이버지식백과, '김시민'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김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