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연(請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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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중국 사신을 위해 대전(大殿)에서 직접 베푸는 연회.

개설

조선에서 중국 사신을 맞이하여 베푸는 연회로는 다음 종류가 있다. 서울에 도착하면 그 도착을 축하하여 베푸는 환영의 하마연(下馬宴), 사신이 서울에 도착한 다음날에 베푸는 익일연(翌日宴), 익일연 다음에 왕이 대전(大殿)에서 직접 베푸는 청연(請宴), 사신의 노고를 위로하는 위연(慰宴), 사신이 떠나는 날이 결정된 후에 베푸는 환송의 상마연(上馬宴) 그리고 사신이 떠날 때 베푸는 전연(餞宴) 등이다. 중국 사신의 위연은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 주관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일 외에 신하를 위해 베푸는 청연도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청연의 기본적인 예법은 『의례(儀禮』「공식대부례(公食大夫禮)」에 근거한다. 공식대부례는 왕이 연회를 열어 다른 나라에서 온 사신을 대접하는 의례이다. 왕은 먼저 대부를 사신의 숙소에 보내 사신을 영접하고, 장차 거행될 연회에 대해 알려준다. 사신은 3차례에 걸쳐 사양하고, 마지막에 영접 온 대부를 따라 나서서 연회 장소에 도착한다. 손님을 위한 술·음료·음식과 좌석 등이 모두 갖추어지면 왕은 예복을 입고, 대문 안에서 사신을 맞이한다. 주인과 손님은 서로 3번 절하고, 곧장 답례를 올린다. 그런 후 자리에 앉는다. 선부(膳夫)와 하인들이 정(鼎)조(俎)에 담은 생선과 고기, 그리고 해(醯)와 장(醬)을 올린다. 손님의 급수에 따라 술을 돌리는데 3작에서 9작까지 횟수가 다르다. 9작이 돌려면 위연에 차려진 음식이 매우 많을 수밖에 없다.

조선초기에는 명나라 사신의 청연과 관련된 기록이 많이 보인다. 인조대와 효종대에는 청나라 사신의 청연과 관련된 기록이 많다. 청나라 사신의 경우 청연의 날짜와 내용에 대해 까다로운 요구를 많이 하여 조정의 골칫거리였다.

절차 및 내용

중국 사신의 청연 절차와 관련된 내용은 사신이 오기 전에 조직된 영접도감에서 규례에 의하여 주관하였다. 중국 사신이 체류하는 동안 영접도감에서는 청연의 날짜를 정해 그들과 협의를 하였다. 협의 내용은 날짜를 비롯해 장소와 연회에 대한 것이었다. 특히 주연(酒宴)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다례(茶禮)로 할 것인지에 대한 협의는 청연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었다.

청연의 시기가 정해지면 영접도감의 한 부서인 연향색(宴享色)에서는 연회의 준비, 다례(茶禮)·별다례(別茶禮)·별사주(別賜酒)의 마련, 악기의 구성 등에 대해 실행을 담당하였다. 왕실의 두 번째 기일인 상일(祥日)이나 매년의 기일(忌日)이 있는 날에는 연회가 마련되지 않았다. 청연은 왕이 직접 참여해야 하나 건강 등의 이유로 불참하고 왕세자가 대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왕이 직접 청연을 베푼 모습을 그린 그림이 한 폭 전해진다. 청나라 한림원(翰林院) 학사 아극돈(阿克敦)은 1725년(영조 1) 3월 17일 청나라 사신단의 부대표에 해당하는 부래(副勑)로 조선에 왔다. 그는 20폭의 『봉사도(奉使圖)』를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제18폭에 영조와 자신의 상사인 견산질(遣散秩) 대신(大臣) 각라서로(覺羅舒魯)가 청연을 하는 모습을 담았다. 아극돈은 그전에도 이미 3차례나 조선을 방문했던 조선 전문 사신으로, 이번에 온 목적은 그 전해에 경종(景宗)이 돌아가신 것을 알고 늦게 조문을 하면서, 동시에 영조의 책봉(冊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림의 오른쪽에는 이 장면을 묘사한 아극돈의 시(詩)가 적혀 있다. “산해진미의 음식이 차려졌고, 아름다운 대자리 넓게 깔렸다. 두 벽은 병풍을 쳤고 나머지 두 벽은 열렸는데, 그 풍경이 아름답다. 술을 한 잔 올리면서 꽃 한 송이를 바치네. 사인(使人)이 비로소 물러나면 악인(樂人)도 나아가네. 음악 소리를 들어보니, 그것이 조선의 노래이다. 무동의 옷소매가 짝을 이루며, 펼쳐졌다 접어졌다 조화를 이루네. 안타깝게도 춤은 끝이 나고, 나는 취하였네. 그래도 음악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하니, 사람들에게 빚을 많이 지는구나.” 아극돈은 별도로 “무릇 술이 7번 올려지면 음악이 멈추고 연회는 끝난다. 집사자는 모두 머리에 꽃을 꽂았다. 무동은 긴 소매 옷을 입고 머리에 꽃을 얹었고, 노래와 소리는 서로 조화를 이루는데, 나는 그 음(音)을 알지 못한다.”고 적었다.

그림에는 갈색 관복을 입은 사인(使人) 한 명이 양손으로 꽃을 바쳐 들고 영조와 청나라 대표에게 올렸다. 녹색 관복을 입은 사인은 무릎을 꿇고 상 옆에 앉았는데, 관복의 색으로 보아 통역을 맡은 역관(譯官)인 듯하다. 이 연회의 주빈 두 사람이 앉은 자리 앞에는 원반에 음식 한 그릇과 상아로 만든 흰색의 젓가락이 놓였다. 그러나 상 위에 오른 음식이 무엇인지는 알 길이 없다. 두 주빈의 뒤로 또 다른 사인이 음식 한 그릇이 놓인 원반을 높게 들고 있다. 사실 궁중의 연회는 아무렇게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음악과 노래 그리고 술잔 혹은 찻잔은 연회의 과정을 격식대로 치르는 마디 역할을 했다. 이와 함께 술잔을 권했는데, 이 청연은 아극돈의 시에 의하면 7작까지 진행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영접도감의궤(迎接都監儀軌)』
  • 『봉사도(奉使圖)』(중국민족도서관 소장)『의례(儀禮)』
  • 왕런샹 저·주영하 역, 『중국음식문화사』, 민음사, 2010.
  • 김경록, 「朝鮮時代 使臣接待와 迎接都監」, 『韓國學報』30권 4호, 2004.
  • 주영하,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사계절,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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