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百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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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조선시대 특정한 신분 계층을 지칭하거나 국민 전체를 통칭하는 용어.

개설

보통 백성(百姓)은 일반 국민·인민 등을 통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지만,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에는 특정한 하나의 신분 계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내용 및 특징

일반적으로 백성은 평민의 별칭이다. 중국 전국(戰國)시대 이전의 백성은 귀족의 통칭이었으나 전국시대 이후에는 평민의 통칭이 되었다. 『시경(詩經)』「소아(小雅)」「천보(天保)」편에 ‘군려백성(群黎百姓)’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정현(鄭玄)의 전(笺)에 "백성은 백관(百官)의 족성(族姓)"이라고 하였다. 『상서(尙書)』「요전(堯典)」에도 ‘평장백성(平章百姓)’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에서의 백성은 귀족을 지칭하였다. 이는 전국시대 이전에는 성(姓)을 가진 계층은 관직을 가진 귀족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전국시대 이후에 백성은 권세나 지위가 없는 각종 성씨의 국민을 지칭하는 통칭이 되었고 현재는 백성 대신 국민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우리나라에서 백성이라는 용어의 사용은, 고려시대와 조선초기까지는 특정한 신분 계층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조선초기 국가의 양인 확보 정책에 의하여 백성은 일반 국민 전체를 의미하는 용어로 점차 변화되었다.

즉, 조선초기에서부터 조선말기까지 전시기에 걸쳐서 백성이라는 용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는데, 일반 평민을 지칭하기도 하고 관료들을 포함한 모든 국민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이성계가 백성을 이끌고 전쟁에 나갔다는 경우는 전자, 변방에 침입한 적을 격퇴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였다는 경우는 후자에 해당하는 용례이다[『태조실록』 총서 47번째기사] [『태조실록』 총서 69번째기사].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내린 조칙에도 "이에 비로소 국운이 확장되고 황실이 신장되며, 그로써 영토가 안녕하며 그로써 백성을 보전할 수 있고[因以得保全百姓] 그로써 후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백성도 일반 국민이나 인민을 지칭하는 통칭이었다(『순종실록』 2년 6월 15일).

변천

고려시대에 백성은 하나의 신분 계층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당시 기록에 ‘인리백성(人吏百姓)’, ‘향리백성(鄕吏百姓)’, ‘기인백성(其人百姓)’ 등으로 직역(職役)을 의미하는 ‘인리’, ‘향리’, ‘기인’과 ‘백성’이라는 용어가 이어서 표기된 예가 많이 나온다. 이러한 백성의 계층적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백성도 인리나 향리, 기인과 마찬가지로 지방 행정의 말단에 위치하고 있지만, 인리 등은 군현(郡縣)의 지배 계층인 데 반하여 백성은 촌락의 지배자인 촌장(村長)·촌정(村正) 계층을 가리킨다. 이때의 촌락은 신라의 지역촌(地域村) 단계는 벗어났지만 아직 조선의 면리제(面里制)는 발생하지 않은 과도기적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백성에 해당하는 촌장·촌정은 촌락 내에서 상당한 권위를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일반 평민층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이러한 점에서 군·현의 지배 계층인 인리와는 구별된다.

또한 촌장·촌정은 신분적으로는 일반 평민층과 같다 하더라도, 그들은 일반 평민층 내에서는 부유한 계층 가운데 선임되었으므로 사회 변동기에는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결국 백성 계층은 고려후기의 사회적 변동기에 관인(官人) 신분으로 상승하였다.

그러나 고려말기의 백성에 대한 기록과 조선 초기의 문헌에 나타나는 ‘전조판정백성(前朝判定百姓)’ 또는 ‘고려판정백성’ 등의 용례를 분석해 보면, 백성을 하나의 특정 신분층으로 파악하고 있다. 백성은 백성성(百姓姓)이라는 특징적인 성씨를 갖고 있으면서 지연·혈연으로 결합된 사회 집단이다. 이들은 향(鄕)·소(所)·부곡(部曲) 등 천민 집단과 구별되는 군·현인의 신분을 가졌으며, 인리성(人吏姓) 집단과도 구별되는 계층이었다. 이러한 차이는 차역(差役)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들이 담당한 역은 이(吏) 계층의 향역(鄕役), 지장(紙匠)·묵척(墨尺)·수급(水汲)·도척(刀尺) 등 간척(干尺)이 지는 천역(賤役), 군인이 부담하는 군역(軍役) 등과는 구별되며, 백성은 이들 역을 제외한 여러 종류의 잡역(雜役)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의 백성의 역은 일반 농민 즉 백정(白丁)의 역과 비슷해 백성을 일반 농민으로 볼 수 있는 소지는 있다. 그러나 조선초기의 ‘전조(고려)판정백성’의 예처럼 일반 농민과는 동일시할 수 없으므로, 양자가 역의 부담에 있어서는 비슷하지만 신분적으로는 구별되었다.

조선초기까지의 특정한 계층을 의미하던 백성이라는 용어는 국가의 양인 확보 정책에 따라서 신량역천(身良役賤) 계층이나 양천(良賤)이 불분명한 계층을 양인으로 파악하는 정책, 또는 단계적 양인화 과정을 통하여 모든 계층의 인민을 가리키게 되었다.

참고문헌

  • 이수건, 『한국 중세 사회사 연구』, 일조각, 1984.
  • 채웅석, 「고려전기 사회구조와 본관제」, 『고려사의 제문제』, 삼영사, 1986.
  • 김현영, 「「고려판정백성」의 실체와 성격: 14세기 말·15세기 초 양인 확보 정책과 관련하여」, 『사학연구』38, 1984.
  • 이수건, 「「토성(土姓)」 연구」, 『동양문화』16, 1975.
  • 이우성, 「여대(麗代) 백성고(百姓考): 고려시대 촌락 구조의 일단면」, 『역사학보』14, 1961.
  • 武田幸男, 「高麗時代の百姓」, 『朝鮮學報』28,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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