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흥역(駒興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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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 지역의 역도 중 하나인 양재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고려전기 전국의 525개 역을 22개 역도(驛道)로 편성하면서 역참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이때 구흥역(駒興驛)은 설치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구흥역의 존재는 1420년(세종 2)부터 확인되는데(『세종실록』 2년 8월 12일), 이로 볼 때 구흥역은 고려후기나 조선초에 성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京畿左道忠淸道程驛察訪)에 소속되었다가 이후 양재도(良才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으며,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구흥역은 경기도 용인현에 설치되었다. 양재역(良才驛)·낙생역(樂生驛)·김령역(金寧驛)·좌찬역(佐贊驛)·분행역(分行驛)·무극역(無極驛) 등과 함께 경기좌도충청도정역찰방(京畿左道忠淸道程驛察訪)에 소속되었다. 이후 『경국대전』 체제에서는 양재도(良才道)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용인현 조에 따르면, 구흥역에는 역노(驛奴) 26명과 대마(大馬) 3필, 기마(騎馬) 6필, 복마(卜馬) 2필 등 총 11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한편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에 따르면 마호수(馬戶首) 7명이 역마 7필을 관리하였으며, 위답(位畓) 45석 6두락, 밭 6석 1두락이 있었다고 한다. 그에 비해 『용인군지(龍仁郡誌)』에는 위답 73석 17두 5승락, 밭 78경(耕), 도조(賭租) 384석 12두, 태(太) 36석 5두 4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1899년에 발행된 『용인군지』에는 위답 73석 17두 5승락, 밭 78경(耕), 도조(賭租) 384석 12두, 태(太) 36석 5두 4승으로 기록되어 있다.

변천

1460년(세조 6) 2월에 경기도와 하삼도(下三道)의 역을 정비할 때 역승(驛丞)을 없애고 찰방(察訪)으로 하여금 여러 역도를 아울러 관리하게 했는데, 역로가 멀어 제대로 순시하지 못하는 등 각종 폐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구흥역은 경기좌도에 속하여 경기좌도찰방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그 뒤 조선전기의 역제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는 양재역·낙생역 등과 함께 양재도에 소속되었다. 이후 양재도의 속역으로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구흥역은 용인현 남쪽 5리 지점에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행정 구역으로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에 해당한다.

한편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구흥역이 위치한 곳의 원래 지명은 용흥(龍興)이었는데, 이곳을 지나던 정승 하륜(河崙)이 "용흥은 참역(站驛)의 이름으로 맞지 않다."고 하여 구흥으로 고쳤다고 한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 『여지도서(輿地圖書)』
  • 『용인현읍지(龍仁縣邑誌)』
  • 『용인군지(龍仁郡誌)』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용인시사편찬위원회, 『용인시사』1, 용인시, 2006.
  • 이인영·김성환, 『내 고장 용인 지명·지지』, 용인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2001.
  • 오일순, 「고려시대 역제의 변동과 잡색역」, 연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 정요근, 「고려전기 역제의 정비와 22역도」, 『한국사론』45, 2001.
  • 정요근, 「高麗·朝鮮初의 驛路網과 驛制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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