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역)(詔使(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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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의 접대에 따른 노동력 징발과 잡물 수취의 임시세.

개설

조사역(詔使役)은 산릉역(山陵役)과 더불어 대동법 이후에도 민역(民役)을 사용할 수 있도록 규정된 요역 종목에 포함되었다. 사신이 왕래하는 연로(沿路) 각관에서는 많은 요역 부담이 따랐다. 특히 의주를 비롯한 평안도 여러 군현과 황해·경기 지역이 그러하였다. 사행의 접대와 관련하여 각종 잡물이 분정되는가 하면, 교부(轎夫)·담궤군(擔櫃軍) 등 각종 운송역에 징발되기도 하고, 이들이 머무는 역로의 관사를 수리하는 일도 매번 되풀이되었다.

조사(詔使), 곧 중국 사신 일행이 서울에 들어오기까지 도중 7군데에서 맞이하여 위로연을 베푸는 일, 수백 마리의 쇄마(刷馬)를 징발하는 일 등은 지방군현에서 맡는 힘든 일거리였다. 특히 탐학한 것으로 알려진 1625년(인조 3)의 조사 일행은 내를 건널 때에 다리가 없으면, 무교가(無橋價)란 이름으로 은자(銀子)를 받아냈고, 인삼 500근을 개성부에서 강탈하느라, 결국 가호마다 강제로 징수하는 사태를 빚게 하였다. 조사가 오면 외방의 군현에서는 특산물의 조달을 비롯하여 갖가지 부역이 평상시보다 크게 늘었고, 이 틈에 관리들이 사리(私利)를 추구하는 수탈을 자행함으로써 민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471년(성종 2년)에 제정된 역민식(役民式)에서, 역사의 규모가 커서 별례조발(別例調發)이 필요할 경우에는 6결에서 1명씩 역부를 차출할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8결에서 1명의 역부를 내는 상례조발과 달라서, 더 많은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할 중요한 요역 종목으로 지정한 것이었다. 별례조발의 요역 종목에는 축성역, 미곡 운반 등의 일과 함께 중국 사신의 가마꾼을 차출하는 일이 포함되었다. 이처럼 조선초기부터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데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내용

1606년(선조 39) 사신 접대를 위하여 임시로 설치된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는 경기·황해·충청·강원의 수군과 차비군(差備軍) 약 800여 명을 1개월씩 징발해서, 남별궁(南別宮)·태평관(太平館)·남관왕묘(南關王廟)·성균관(成均館) 등을 고쳐 짓는 수리역군(修理役軍)으로 사역하였다. 1608년(선조 41) 영접도감에서는 다시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각 도에서 300명의 연군(烟軍)·수군을 수리군으로 1개월간 징발했는가 하면, 따로 300명의 병조 상번군을 동원해서 각처 수축, 도로 닦기, 교량 건설 등의 역사를 맡겼다. 그 밖에 차비군·수소군(修掃軍)·조역군(助役軍) 등의 명목으로 한성부의 방군(坊軍) 및 각 도의 연군 등이 징발되었고, 궐문 밖의 채붕(彩棚), 연로의 결채(結彩) 등을 위해서도 많은 민력(民力)의 소모가 따랐다.

조사역에는 운송의 노역을 담당하기 위해서 많은 마필(馬匹)이 조달되었다. 쇄마(刷馬)는 외방 각 군현의 민결(民結)에서 고립가(雇立價)를 내는 방식으로 마련되었다. 물납세화 된 쇄마역을 전결에서 거두어들인 것이었다. 각 군현에서 쇄마를 몰고 온 이들은 모두 1개월분의 식량을 휴대하고 상경하였다. 1개월의 체류 비용 및 오고 가는 노자 등을 포함하면 쇄마 1필을 조달하는 데 드는 비용은 면포 수십 필을 넘어서는 큰 부담이었다. 이러한 폐단을 고치기 위해서, 1608년(광해군 즉위년)의 조사역에서는 처음으로 각 도에서 가포를 대신 거두도록 조치하였다. 각 도의 원근에 따라, 쇄마 1필에 5승목 8필~10필씩을 거두어 서울에서 고립하게 한 것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말을 가지고 있으면서 고립에 응하는 사람들이 매우 많아서, 먼 지방 농민들이 왕래하는 폐단을 덜 수 있었다.

조사의 역에 드는 많은 경비와 인력은 공식적인 접대에 한정되지 않았다. 사신 및 그 일행에 대하여 여러 명목의 사례가 주어졌는데, 흔히 막대한 양의 은자나 인삼 등의 물자가 소모되었다. 조사에게 주는 예단뿐 아니라, 사신 일행인 원역(員役)에게 증여할 물자도 준비되어야 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양의 은과 인삼을 예물로 바치는 일은 17세기 초부터 성행하는 새로운 관례였다.

인조대에는 조사 접대를 위해서 10,000냥 가량의 은을 마련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사신 접대를 위한 은자는, 대부분 각 도의 전결에서 면포를 거두는 조치, 곧 임시적인 결포(結布)의 수취를 통해서 충당되었다. 3결포(三結布)·4결포(四結布) 등의 형태로 전결에 부과해서 거두어들인 면포로, 시전과 민간에서 은을 구입하였다. 조사를 맞이하기 위해서, 전결에 따라 면포를 거두는 것은 곧 항규(恒規)라고 인식될 만큼 관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전란이나 기근이 들어서 민력이 이에 따르지 못할 때, 혹은 결포만으로 부족할 때, 은자 마련을 위한 다양한 방책이 강구되었다. 예컨대 조정 백관을 대상으로 품계에 따라 은을 내게 하는 품은(品銀)과 도성 방민의 가호 단위로 부과하는 호은(戶銀)을 거두기도 하였다. 중앙 각사에 비축된 면포, 예컨대 군수목(軍需木)·여정목(餘丁木)·장인가포(匠人價布) 등을 옮겨 쓰는 것을 비롯해서 공조·선공감·사복시·비변사·병조·호조·훈련도감·진휼청 등의 재원을 활용하는 방도, 남부 지방의 수군들에게 포를 받고 입방(入防)을 면제시켜 주는 방법 등도 채택하였다. 동원 가능한 모든 비축 재화와 신역세(身役稅) 수입 등이 여기에 투입되었던 셈이다.

조사의 역에 막대한 재정 지출이 따르게 된 것은 선조대 이후의 일로 보인다. 1602년(선조 35)의 조사 일행을 접대하는 데 지출된 액수는 은자 10,000냥, 삼 1,000근 정도였다. 1621년(광해군 13)의 조사 일행을 접대하는 데에는 은자 70,000여 냥에 달하였다. 그러나 인조대 들어서 지출 액수는 더욱 크게 늘어서 100,000냥을 넘나들게 되었다. 조사역을 위한 은자의 지출 액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던 셈이다. 병자호란 이후 해마다 청(淸)에 대한 막대한 세폐(歲幣)를 부담하게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칙사인 청사(淸使)에 대한 접대에 드는 비용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1645년(인조 23)의 경우 2차례의 청사 입국에 모두 21,000여 냥의 은자를 지출하는 데 그쳐서, 그 추세를 알 수 있었다.

변천

중국에서 보낸 사신은 광해군대까지는 학사(學士) 가운데(중에) 임명된 자가 많았으나, 인조대 이후에는 수만 냥의 은자를 뇌물로 바치면서까지 사신으로 파견되기를 희망하던 환관들로 채워진 경우가 많았다. 파견될 조사가 청렴한지 아닌지의 여부가 조정의 중요 관심사가 되었다. 조사의 청렴·탐욕 여하에 따라서 호조에서 지출할 은자의 총량이 40,000냥에서 130,000냥을 오르내렸기 때문이다. 국가적인 대역으로서의 조사역에 응할 재정적 부담 수준이 결정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인조대 이후 입국한 여러 사신은 가혹한 수탈을 자행하였다. 그들을 수행하는 원역도 많아서, 1625년(인조 3)의 경우에는 일등두목(一等頭目)이 140여 명까지 이르렀다. 반면 그 이듬해에 입국한 조사는 청렴·검소하여서 평안·황해도에서의 수탈량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 때문에 이곳 백성들이 송덕비를 세우겠다는 격식 밖의 청원을 한 일조차 있었다. 조사의 징색(徵索)에 의한 국가의 재정적 부담, 민간의 요역 부담이 과중했던 실정을 알 수 있다.

17세기 초엽에는 조사의 접대를 위한 재정 충당책으로 결포(結收)를 거둔 사례가 많았다. 인조반정 직후 조정에서는 한때 광해군대의 결포 수취를 중지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조사를 접대하기 위하여 전결 3결마다 면포 1필을 거두는 조치가 아직 채 완료되지 못한 상태에서 일단 수포의 명령을 거두었지만, 곧 번복되고 말았다. 조사가 입국한다는 보고를 다시 받았기 때문이다. 결포는 비상한 상황 아래서 최선의 재정 보완책으로 채택된 것이었다. 이듬해, 정부는 다시 조사 접대를 위한 결포를 시행하게 되었다. 이때의 수취량은 4결에서 1필의 면포를 거두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정묘호란 이후 민생이 피폐한 지경에 이르렀던 1628년(인조 6)경에는, 조사의 접대를 위한 결포를 분정하지 않았다. 외방의 민력을 감안하여 중앙 각사의 비축분을 활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1634년(인조 12)의 경우에는 3결에서 1필씩 거두어도 필요량을 충당할 수 없게 되자, 삼명일방물(三名日方物)을 면포로 대신 거두는 조치를 취하고, 이어서 호남의 수군들에게 면포를 받고 입방(入防)을 면제시켜 주는 방법을 채택하였다. 인조대 후반에는 칙사를 접대하는 비용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1638년(인조 16)에는 10결당 1필을 거두었고, 이듬해에는 8결당 1필을 거두었다. 1645년(인조 23) 청의 조제사(弔祭使)를 접대하는 데에는 23결마다 1 필씩으로 정하되, 각종 특산물은 별도로 지방에 분정하였다.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 위한 결포로서는 가장 마지막 사례에 속하였다.

의의

조사의 역은 국가의 재정적 부담이나 민간의 요역 부담이 매우 과중하였던 점에서 17세기 초엽 국가 재정과 민생을 피폐하게 했던 최대의 폐원 중 하나였다. 그것은 대체로 전결에 따라 면포를 거두는 결포의 방식으로 채워지는 것이 관례였다.

17세기 초엽에는 별역(別役)이라는 이름 아래 규례 밖의 대규모 부역 노동이나 현물세를 일시적으로 거두는 일이 빈번하였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주변 정세 속에서 국방·외교 분야의 비상한 대응 방식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이 같은 별역으로는 서량미(西糧米), 군량미의 임시 조달, 부서군(赴西軍)의 자장목(資裝木), 군수물자의 조달 등이 속하였다. 그 조달 방식은 흔히 전결에의 분정이었다. 이 시기의 여러 가지 별역 중 특히 많은 인력과 물자가 소모되는 분야는 역시 산릉역·조사역의 2가지였다. 모두 대동법 이후에도 민역의 대상으로 파악되는 국가적인 대역이었다. 17세기 초엽의 빈번한 결포 징수의 조치가 이 분야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한편 이 같은 역사에서 결포가 수취되었던 것은 요역의 물납세화·전결세화를 반영하였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김경록, 「朝鮮時代 使臣接待와 迎接都監」, 『韓國學報』 117, 2004.
  • 김옥근, 『朝鮮王朝財政史硏究』, 일조각, 1984.
  • 윤용출, 「17세기 초의 結布制」, 『釜大史學』 19,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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