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의(引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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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의례를 담당하던 통례원(通禮院) 소속의 종6품 관직.

개설

1466년(세조 12) 1월 15일에 처음 설치된 관직이다. 당시까지 국가 의례를 담당하던 통례문(通禮門)을 통례원으로 개칭하면서, 종6품의 봉례랑(奉禮郞)을 고쳐 인의(引儀)라 하였다. 정원은 8명이고, 관직의 임기는 900일이었다. 서얼에게 제수되기도 했는데, 인의 출신의 서얼은 현령까지 제수될 수 있었다.

인의의 선발은 먼저 현직 인의들이 각기 3인씩을 추천하여 후보자의 사조(四祖)와 관력(官歷) 등을 상고하였다. 그 뒤 예조(禮曹)와 이조(吏曹)의 당상이 통례원에 모여 후보자를 대상으로 취재(取才)한다. 이렇게 해서 최종 후보자가 정해지면 이를 완천(完薦)이라고 하였다. 완천은 인의의 추천에만 해당되는 용어는 아니고 한림(翰林)이나 주서(注書) 등의 추천 시에도 완천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완천이 끝난 뒤 인의에 결원에 생기면 완천된 인원에서 다시 창(唱) 등으로 취재하여 충원하였다. 이러한 추천 과정은 인의가 의례를 주관하는 관원의 하나이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담당 직무

인의는 각종 의례 시 행사 순서에 따라 창을 하거나 종친 혹은 문무백관을 인솔하고, 사자(使者)의 인도 등을 담당하였다. 예를 들어 왕비 책봉 시 왕의 명을 받들고, 사자가 나아가는 단계에서 종친과 문무백관을 인솔하거나, 왕명을 받은 사자를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상참(常參)을 할 때에도 상참관들을 인솔하여 들어가며, 창을 통해 행사의 진행 순서를 전달하였다.

이 밖에도 왕이 혼례를 할 때나 이웃 나라의 글과 폐물을 받는 의식 등에 동원되어 역할을 수행하였다. 1680년(숙종 6)과 1722년(경종 2)의 공신 회맹제 때나 1799년(정조 23)에 중국 태상황(太上皇)이 죽은 후 마련된 영태상황상전부칙서의(迎太上皇喪傳訃勅書儀)나 성복의(成服儀), 진위겸진향사배표행례의(陳慰兼進香使拜表行禮儀) 등에도 동원되었다.

한편 인의는 의례의 주관 주체에 따라서 다른 명칭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753년(영조 29년)에는 하교에 따라 대전(大殿)의 조의(弔儀) 때는 찬의(贊儀)를 전의(典儀)라 일컬었다. 왕세자가 예식을 행하면 인의를 장의(掌儀)라 칭하며 왕세손이 예식을 행하면 인의를 사의(司儀)로 일컬었다. 또한 백관이 예식을 행하면 인의를 도의(導儀)로 부르도록 하였다.

변천

업무가 많아서인지 중종대에 인의 이외에 겸인의(兼引儀)가인의(假引儀) 각 6명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조선후기 편찬된 법전에서는 직제가 약간씩 변하였는데, 『속대전』에서는 정원 8명 가운데 2명이 감원되었다가, 『대전통편』에서 다시 복구되었다. 이때 정원 가운데 2명은 겸인의를 역임하고, 의식 절차를 소리 높여 이끄는 일인 여창(臚唱)을 잘하는 자로 임명하도록 규정되었다. 또한 한성부 소속 정7품인 참군(參軍)의 정원 3명 가운데 1명은 인의가 겸직하였으나, 이 제도는 1675년 폐지되었다.

고종대인 1885년(고종 22) 5월에는 세자시강원 관원인 이사(貳師)빈객(賓客)사은숙배(謝恩肅拜)할 때 인의가 호창(呼唱)하도로 정식화하였다. 이후 인의의 폐지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894년에 통례원을 계승하여 장례원(掌禮院)이 설치되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육전조례(六典條例)』
  • 『은대편고(銀臺便攷)』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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