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용위(忠勇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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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충용위 |
한글표제 | 충용위 |
한자표제 | 忠勇衛 |
관련어 | 신호위(神虎衛),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초기 |
집필자 | 김종수 |
폐지 시기 | 조선 태종 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충용위(忠勇衛) |
고려 공민왕 때 국왕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조직.
개설
충용위는 1356년(고려 공민왕 5) 11월에 설치되었다. 이해 5월부터 공민왕이 기철(奇轍)·권겸(權謙)·노책(盧頙) 등 부원배(附元輩)들을 죽이고, 이어서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를 혁파한 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는 등 대대적인 반원운동(反元運動)을 전개했는데, 이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만 세력으로부터 국왕을 호위하기 위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충용위는 모두 4위(衛)로 구성되었으며, 각 위(衛)마다 장군(將軍) 1인, 중랑장(中郞將) 2인, 낭장(郎將) 2인, 별장(別將) 5인, 산원(散員) 5인, 위장(尉長) 20인, 대장(隊長) 40인이 배치되었다. 따라서 충용위의 총 정원은 300명인 셈이다. 이들의 주된 임무는 궁성을 지키는 것이며, 이 밖에 외적의 침입을 당하면 개경 주위의 수비에 동원되기도 하였다.
내용 및 변천
고려시대에 국왕의 호위와 도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중앙군으로는 2군 6위가 있었다. 2군 6위는 지휘관인 장군(將軍)을 제외하면 5품 이하 중랑장(中郞將), 낭장(郎將), 별장(別將), 산원(散員), 교위(校尉), 대정(隊正)에 이르는 부병(府兵)과 보승(保勝)·정용군(精勇軍)으로 이루어진 농민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보승·정용군 등은 지방에서 번상(番上)하는 농민병으로서 정예 병력은 아니었다. 2군 6위의 실제 군사력을 이루는 것은 중랑장(中郞將)~대정(隊正)에 이르는 부병(府兵)이었다. 이들은 평상시 농민병을 지휘·통제하면서 국왕의 호위와 개경의 수비를 담당하였고, 비상시에는 이들을 골간으로 하고 지방군을 포괄하는 3군(軍), 혹은 5군(軍)을 확대 편성하여 대처하였다. 부병은 평상시, 비상시를 막론하고 고려 군대의 중추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후기에 들어와 부병의 군사력은 부실해져갔다. 무신집권기에는 집권자의 마음대로 부병이 임명되었으며, 승진에는 뇌물이 횡행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원간섭기에 들어와 더욱 심화되었다. 납속보관제(納粟補官制)의 시행으로 부병직은 합법적인 매매의 대상이 되었고, 귀족의 어린 자제들과 문인들이 음서(蔭敍) 등을 통해 부병직을 차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국왕의 실질적인 호위 병력은 지극히 부실해졌다. 따라서 원간섭기 이후 국왕들은 자신들의 호위 병력을 별도로 마련하고자 하였다. 즉 충렬왕은 즉위하자마자 원(元)에 볼모로 다녀온 의관 자제를 모아서 홀치[忽赤]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부병과는 별도로 만들어진 국왕 호위병의 첫 사례이다. 1356년(고려 공민왕 5)에 만들어진 충용위 역시 장군 이하 중랑장, 낭장, 별장, 산원, 위장, 대장 등으로 이루어져 부병의 조직과 동일하지만 부병에 속하지 않는 국왕 호위병이다.
충용위는 1357년(고려 공민왕 6) 왜구가 강화도 교동(喬桐)을 침범하자 이를 막기 위해 출병하는 등 주 임무인 국왕의 호위 외에도 왜적을 토벌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그런데 1361년(고려 공민왕 10)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복주(福州 : 현 안동)로 피신했을 때 제구실을 하지 못해 혁파가 논의되기도 했으나, 그대로 잔존했다. 그 뒤에도 홀치[忽赤] 등과 같이 왕의 숙위부대라는 것을 빙자해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는 등의 민폐를 끼치고, 또한 이의 존재로 인해 정규 군사조직인 2군 6위(二軍六衛)의 체제가 허설화되어 곤란하다는 이유로 그 혁파가 자주 논의되었다. 1389년(고려 공양왕 1) 헌사(憲司)에서는 애마(愛馬)들의 폐해와 2군 6위 제도의 유명무실함을 거론하면서 충용위를 신호위(神虎衛)에 합칠 것을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폐지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되면서 10위가 정비될 때에도 잔존하였다가 이후 군사제도가 더욱 정비되면서 태종 때에 폐지된 것으로 추측된다.
의의
고려 때에는 2군 6위 외에는 별도의 중앙군 조직이 없었다. 그러나 고려후기에 홀치[忽赤], 충용위(忠勇衛) 등이 만들어지면서 다양한 군종(軍種)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이러한 추세가 더욱 강화되어 부병의 계통을 잇는 갑사(甲士) 이외에 내금위(內禁衛), 별시위(別侍衛), 충의위(忠義衛), 충순위(忠順衛), 족친위(族親衛) 등 다양한 군종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났다. 고려말 충용위의 설치는 이러한 다양한 조선초기 군제의 원형을 이룬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金鍾洙, 「朝鮮初期 府兵制의 改編」, 『歷史敎育』77, 2001.
- 李永東, 「忠勇衛考」, 『陸軍第三士官學校論文集』13, 1981.
- 千寬宇, 「朝鮮初期 五衛의 形成」, 『歷史學報』17·18合輯, 196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