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진(竹山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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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죽산진 |
한글표제 | 죽산진 |
한자표제 | 竹山鎭 |
관련어 | 광주도(廣州道), 광주진(廣州鎭), 수어청(守禦廳), 죽산도호부사(竹山都護府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윤훈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죽산진(竹山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1년 9월 11일, 『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선조실록』 37년 10월 12일, 『숙종실록』 21년 9월 30일 |
조선시대에 경기도 죽산 지역에 설치한 진.
개설
조선 초에 죽주(竹州)에서 죽산(竹山)으로 바뀌면서 현감이 파견되었다. 원래 충청도에 속해 있었는데 경기도로 이속되었다. 군익도(軍翼道)체제가 전국으로 확장될 때에는 광주도(廣州道)에, 다시 진관체제로 개편되면서 광주진(廣州鎭)으로 편성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군사 요지에 해당되어 도호부로 승격되었다. 특히 영장제가 도입되면서 도호부사로서 영장을 겸하였다. 도성 방위를 강화하고자 설치된 총융청에 속했다가 수어청으로 옮겨졌다. 만연한 도적을 체포하기 위해 토포사가 파견되자 토포영이 되었다. 광주가 유수부로 승격하자 전에 속했던 제진(諸鎭)이 여주진으로 이동되면서 함께 따라갔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죽산은 조선 건국 직후에는 고려시대 이름대로 죽주(竹州)라 불렸고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1413년(태종 13) 죽산현감으로 고쳤다. 그때는 충청도에 속해 있었는데, 1434년(세종 16) 철원을 강원도로 옮겨 가는 대신 죽산이 경기도로 이속되고, 1435년(세종 17) 소속 처가 수원부(水原府)로 정해졌다.
1455년(세조 1) 양계(兩界) 지역에 설치되었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巨鎭)을 두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킬 때 광주도의 우익(右翼)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제도(諸道)의 중익(中翼)·좌익(左翼)·우익을 혁파하는 대신,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을 그 휘하에 소속시킬 때에는 광주진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1543년(중종 38)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1584년(선조 17)에 현(顯)으로 내려갔다가 1596년(선조 29) 다시 격상되었다. 특히 호서(湖西)와 영남(嶺南)의 요로(要路)에 끼어 있으며 관내 산성(山城)을 쌓는 일로 이웃 고을을 병합하고 새로 부사를 설치했다(『선조실록』 37년 10월 12일)고 하므로, 이를 계기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요충지가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지방군을 강화할 목적으로 영장제(營將制)를 도입할 때 그 설치 지역이 되었다.
조직 및 역할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 거진의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면서 별도 설치 시절의 박탈당했던 군사 지휘권을 되찾아왔다. 하지만 병법에 익숙하지 못했던 수령들이 정묘호란 때 문제를 일으키자 군사적 식견이 있는 당상관을 영장으로 파견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지 비용이 크다는 이유로 1637년에 일단 없어졌다. 효종 때 북벌론을 내세우면서 충청도·전라도·경상도 지방에는 영장을 파견하고, 다른 지역에는 수령이 겸하는 겸영장제를 시행하였다.
『속대전(續大典)』에 따르면 죽산도호부사가 후영장(後營將)을 겸하도록 규정되었다. 그 자리에 무신을 고정적으로 파견했다.
인조반정 이후에 도성 방위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1624년(인조 2) 총융청을 설치하여 경기도병마절도사 대신 경기도 병력을 거느리게 했다. 초창기에는 광주 등의 5영(五營)으로 이루어졌으나, 1635년(인조 13) 남한산성에 수어청이 신설되자 광주는 거기로 이속되었다. 그 대신 죽산이 배속되었으나 1651년(효종 2)에 그마저 남한산성으로 옮겼다.『속대전』과 같은 시기에 편찬된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에 따르면 수어청 외영의 후진영장(後鎭營將)을 겸하였다.
전국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자 이들을 대대적으로 체포하기 위해 토포사를 파견했는데, 1695년(숙종 21) 죽산에도 가설하였다(『숙종실록』 21년 9월 30일).
변천
1795년(정조 19)에 수어청의 경청(京廳)을 폐지하고 산성으로 진을 옮기면서 광주를 다시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켰다. 이어서 유수로 하여금 수어사(守禦使)를 겸직시켜 군사와 행정을 한꺼번에 관장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광주진에 속하였던 제진들이 전부 여주진(驪州鎭)으로 이속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죽산의 경우,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에서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하는 것으로 격상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 1977.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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