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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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각 도에 설치된 진(鎭)의 장수로 병마(兵馬)를 통솔했던 종4품의 서반 외관직.

개설

1397년에 도 단위 군사 책임자였던 남방 지역의 도절제사(都節制使)를 폐지하고 변진(邊鎭)을 설치하여 진군(鎭軍)을 두면서 통솔자는 원칙적으로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파견되어야 했다. 하지만 일부의 변진에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를 두었던 것이 그 시초였다. 세종 때 각 진의 지휘관 명칭이 고려식인 것을 탈바꿈해야 한다면서 4품의 호칭으로 정해졌다. 군익도(軍翼道) 체제(體制)의 전국적인 확대와 1457년 진관(鎭管) 체제로의 개편을 통해 종4품의 제진 지휘관으로 되었다. 수령직을 겸하면서 군사와 행정 업무를 겸하여 처리했다.

담당 직무

1397년(태조 6) 당시 도 단위 군사 책임자였던 남방 지역의 도절제사를 폐지하고 변진을 설치하면서 그 책임자로 첨절제사가 파견되었다. 그런데 일부 변진에는 그 대신 동첨절제사가 보내졌다. 이는 왕자의 난으로 제거된 남은(南誾)의 친척들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확인되는데, 전간성진(前杆城鎭) 동첨절제사한천동(韓天童)이 그 예이다(『태조실록』 7년 10월 3일). 본래 첨절제사로 보내져야 했으나 한천동의 품계가 낮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역할은 첨절제사와 같이 진에 소속된 진군을 통솔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도절제사가 다시 회복되었으나 동첨절제사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1423년(세종 5)에 도병마사(都兵馬使)·병마사(兵馬使)라는 호칭이 고려식 제도라는 이유로 각 진의 지휘관 명칭을 새롭게 바꾸며, 4품은 동첨절제사라고 호칭하도록 조치했다(『세종실록』 5년 11월 22일). 이를 계기로 도절제사·첨절제사 아래에서 그보다 적은 규모의 진을 통솔하는 위치로 확정되었다. 진군을 통솔하면서 주변 고을의 수령을 겸대하되 4품이면 동첨절제사라고 했다(『세종실록』 21년 11월 22일). 아울러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방의 양계 지역에도 설치하였다.

양계 지역에서는 군익도 체제를 실시하며 각 고을을 중·좌·우익(右翼)으로 나눠 소속시켰는데, 수령은 직품에 따라 3품은 병마단련사(兵馬團練使), 4품은 병마단련부사(兵馬團練副使), 5·6품은 병마단련판관(兵馬團練判官)을 겸하도록 했다. 이는 1395년부터 실시하도록 규정되었으나 세종 때에는 양계에만 적용되었다. 1455년(세조 1) 군익도 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각 익의 지휘관들을 수령이 겸대하도록 했다. 이어서 1457년(세조 3)에 군익도 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였다. 이로써 주요한 지역을 거진(巨鎭)으로 해서 나머지 주변 지역의 제진(諸鎭)이 그 휘하에 소속되도록 했다. 수령이 겸직했는데 4품이면 동첨제사라고 했으며 ‘○○도 ○○주진병마동첨절제사(○○道○○州鎭兵馬同僉節制使)’로 호칭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정식으로 병마단련부사를 ‘모진도병마동첨절제사(某鎭道兵馬同僉節制使)’로 개칭하면서 제진의 장이 되었다.

변천

『경국대전』에 의하면 종4품으로 경기도 14곳에 설치되었는데 모두 수령이 겸대했으며 나머지 도들도 모두 동일했다. 충청도 12곳에 두었다. 경상도 20곳에 두었다. 전라도 14곳에 두었다. 황해도 11곳에 두었다. 강원도 11곳에 두었다. 영안도 6곳에 두었다. 평안도 17곳에 두었다.

그 뒤에 설치 지역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대전회통』에 최종적으로 정비되었는데, 경기도 16곳, 충청도 15곳, 경상도에 24곳, 전라도 19곳, 황해도 16곳, 강원도에 11곳, 함경도에 7곳, 평안도에는 24곳에 두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김순남, 「진관체제의 확립과 지방군」, 『한국군사사 5 조선전기Ⅰ』, 육군본부, 2012.
  • 오종록, 「조선초기의 병진방위와 병마첨사·만호」, 『역사학보』 123,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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