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융(朴融)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25년(세종 7) = ?]. 조선전기 태종~세종 때 활동한 문신. 이조 정랑(正郞)을 지냈다. 자는 유명(惟明) 호는 우당(憂堂)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조부는 박영균(朴永均)이고, 조모 능주 구씨(綾州具氏) 곧 능성 구씨는 구위(具褘)의 딸이다. 아버지는 박익(朴翊)이며, 어머니 박씨(朴氏)는 박충민(朴忠敏)의 딸이다.

조선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08년(태종 8)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그 해에 문과(文科)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문한(文翰)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태종 11)에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그 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로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 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그도 사간원 사간정준(鄭悛), 헌납정지아(鄭之雅)-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태종실록』 태종 11년 12월 15일) 그 뒤 재 서용되어 형조 좌랑(佐郞), 이조 좌랑, 전사(典祀) 판관(判官) 등을 지냈는데, 노비 오결 문제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아서 면직되었었다.(『태종실록』태종 14년 12월 5일] 1418년(태종 18) 5월에 윤임(尹臨) 등 25인과 함께 직첩을 도로 받았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쳐 이조 정랑 때인 1423년(세종 5) 1월에 강원도 경차관(江原道敬差官)이 되었다. 1425년(세종 7)에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가 되었다. 그는 이 해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憂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