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위진법(五衛陣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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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년(문종 1) 편찬된 『진법(陣法)』을 통해 정리된 조선의 전술 체계 또는 이 전술을 담은 병서.

개설

고려말부터 병학의 원리에 입각한 체계적인 진법을 구축하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익재이제현(李齊賢) 등의 병학 연구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 초 정도전(鄭道傳)의 『진법』이 편찬된 것도 그 연장선이었다. 그 과정에서 표준화된 진법의 원리로서 오행진(五行陣)이 주목되었다. 이는 중국의 고전 병서인 『이위공문대(李衛公問對)』에 나오는 원진(圓陣), 직진(直陣), 예진(銳陣), 방진(方陣), 곡진(曲陣)의 다섯 종류의 진형으로 상대방이 어떤 형태의 진형을 갖추느냐에 따라 능동적으로 변형하여 대처하는 방법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는 이전부터 익숙하였던 음양오행설에 의거하여 운용되었기 때문에 오행진법(五行陣法)이라고 하였다. 특히 세종대 초 변계량(卞季良)은 이전까지의 여러 진법 논의를 정리하여 「진설문답(陣說問答)」을 집필하였다.

오행진법의 개념과 진법 운용에 대한 이론이 정리되면서 세종대 들어 다양한 진법류(陣法類) 병서들이 간행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1421년(세종 3) 7월에는 병조에서 『진도지법(陣圖之法)』을 지어 올렸는데(『세종실록』 3년 7월 9일), 그 저자는 「진설문답」을 지은 변계량으로 생각된다. 『진도지법』은 총설(總說)에 이어 행진(行陣), 결진(結陣), 응적(應敵), 교장(敎場) 등 4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다. 부대 편제는 5위(衛)에 각각 5소(所)를 두되, 5명을 1오(伍), 2오를 소대(小隊), 5오를 중대(中隊), 50명으로 이루어진 10오를 대대(大隊)로 편성하고 이 대대를 모든 전투의 기본 단위로 삼았다. 그리고 진형은 원진, 직진, 예진, 방진, 곡진을 기본으로 하였다. 이를 통해 최초의 오위진법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진도지법』이 편찬된 후 이 진법을 훈련시키고 보급할 훈도관(訓導官)이 각 도에 파견되었다(『세종실록』 3년 7월 28일). 그리고 1422년(세종 4) 11월 세종은 병조에 명하여 군사를 모아 진도(陣圖)를 연습하게 하였고(『세종실록』 4년 11월 14일), 1425년에는 조선의 고유의 화살인 편전 사격을 연습할 때 진설(陣說)을 함께 강습하게 하였다(『세종실록』 7년 6월 27일).

세종 중반기부터 북방 영토 개척이 활발히 진행되면서 여진족과의 충돌이 불가피하였다. 1433년(세종 15) 7월에 하경복(河敬復) 등이 새로이 진서(陣書)를 편찬하여 올렸는데(『세종실록』 15년 7월 4일), 편찬된 해가 계축년이었으므로 이후 『계축진설(癸丑陣說)』이라고 널리 불렸다(『세종실록』 15년 7월 18일). 이 병서의 기본적인 체제와 내용은 『진도지법』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내용이 보다 풍부해지고 세분화되었다. 이는 여진족과의 여러 전투를 통해 『진도지법』의 미비점을 보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유군(遊軍)의 운용을 들 수 있다. 유군이란 기동 예비대적 성격을 지닌 부대로서 『계축진설』에서는 전 병력의 20%를 유군으로 편성하여 적군의 기만, 결원 보충, 척후 등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세종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북방의 정세가 점차 격동하기 시작하였다. 에센[也先]이 이끄는 몽고의 오이라트 족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지면서 북방의 몽고 일대를 통일하고 명나라에 과도한 무역을 요구하면서 갈등을 빚게 되었다. 1449년(세종 31) 오이라트 족이 대거 남하하자 직접 정벌에 나섰던 명나라 황제 영종이 도리어 토목보(土木堡)에서 포로가 되는 이른바 토목의 변이 발생하였다. 그 여파로 몽고의 일부 세력이 조선의 국경 근처까지 진출하고 이에 고무된 여진족의 움직임도 활발해지는 등 국제적 긴장관계가 절정에 달하였다. 그 결과 그동안 소규모의 여진족을 상대하던 진법으로는 더 이상 대처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즉 국가 간의 전면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세종대 후반부터 진법류 병서의 대폭적인 개정 작업이 이루어진다. 1451년(문종 1)에 간행된 『오위진법(五衛陣法)』은 이전의 진법과 비교해 모든 면에서 일신되었다. 『오위진법』에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국가의 전 병력을 동원하는 대규모 부대 운용과 국지적인 분쟁에 대비한 소부대 운용을 동시에 고려한 전법 체계의 확립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오위진법』의 그 편제[分數] 방식에 잘 나타나 있는데, 대장(大將) 아래에 5위가 있고, 위에는 각기 5부(部)가 있으며, 부마다 4통(統)이 있는 편제 방식을 기본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그리고 5인이 오(伍), 25인이 대(隊)가 되며 125인이 여(旅)가 되도록 하는 또 다른 편제 방식이 마련되어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위, 부, 통에 사실상의 정수를 두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두 편제의 결합 방식은 바로 각 통의 인원편성 규모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작전 부대의 규모가 결정된다는 점이다. 즉 통의 규모를 1개 대로 하면 5위의 병력은 2,500명이 되고, 1개 여를 통의 규모로 하면 5위의 병력은 12,500명이 되게 된다. 여기에 전체 병력의 30%를 유군으로 편성한다는 기준을 적용하면 1개 대로 통을 편성할 경우 5위의 병력은 3,571명이 되고, 1개 여를 통의 규모로 하면 5위의 병력은 17,856명이 된다. 이처럼 병력의 다과와 전투 규모에 따라 상이한 진법과 지휘체계를 적용하지 않고 동일한 체제를 이용하되 다만 통의 규모를 조정하여 대처하도록 한 것이다(『문종실록』 1년 6월 19일). 이러한 편제 방식은 편찬 당시인 문종대 개편된 중앙 군사제도인 오사(五司) 및 세조대 오위(五衛) 제도와 부합되어 부대 조직과 전투 편성은 하나로 귀일될 수 있었다.

내용 및 특징

문종대 편찬된 『오위진법』의 맨 앞에 수양대군이 쓴 서문이 있다. 여기서는 문종의 명으로 『오위진법』을 저술한 배경을 밝히고 있다. 본문의 구성은 크게 분수, 형명(形名), 결진(結陣), 용병, 군령(軍令)의 5개로 이루어져 있다. 군령에 이어 장표(章標), 대열의주(大閱儀注)가 덧붙여 있고 마지막 부분에 형명과 결진에 대한 내용을 그림으로 나타낸 형명도(形名圖)가 있다.

형명도에는 먼저 교룡기(蛟龍旗), 휘(麾), 초요기, 대장기(大將旗), 부장기(部將旗), 위장기(衛將旗), 영장기(領將旗) 등의 각종 군사용 깃발과 각(角), 금(金) 등 신호용 악기 등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다음에는 진도가 그려져 있는데 먼저 하도(河圖), 낙서(洛書)와 원진, 직진, 예진, 방진, 곡진이 그려져 있다. 이어 오위도(五衛圖)로서 오위연방진(五衛連方陣), 오위연원진(五衛連圓陣), 오위연곡진(五衛連曲陣), 오위연직진(五衛連直陣), 오위연예진(五衛連銳陣)이 실려 있다.

대열의주는 용겁지세(勇怯之勢) 1, 2, 3, 그리고 승패지형(勝敗之形) 1, 2, 3으로 구성되어 있다. 용겁지세는 군사를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어 공격과 방어, 퇴각과 추격 등 한쪽이 용맹을 과시하면 다른 쪽에서는 겁을 먹는 방식으로 전투를 연습하는 것이다. 승패지형은 좌군과 우군이 결진해 대치한 다음 전투를 벌이다가 각각 한 차례씩 이기고 지는 방식으로 모의 전투를 하는 것이다. 마지막의 발문에는 1455년(세조 1) 7월 집현전 교리한계희(韓繼禧)의 발문과 1492년(성종 23) 8월 홍문관 대제학홍귀달(洪貴達)이 쓴 것이 함께 실려 있다. 이들 발문에는 『오위진법』이 세조대 및 성종대 개정 간행되는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오위진법』은 이전의 진법과는 내용상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앞서 보았듯이 대규모 부대와 소규모 부대의 전술을 함께 운용할 수 있는 전술 체계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은 기병과 보병을 동일한 비중으로 편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각 부에 반드시 기병 2통과 보병 2통을 두도록 하여, 기병을 절반 이상으로 편성하도록 하였다. 이는 보병 못지않게 기병을 중요한 전투력으로 삼아 그 비중이 상당히 높았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조선초기 야인 정벌에 참여한 조선군은 대다수가 기병으로 편제되어 있었다는 것도 이를 반증한다. 이전보다 기병의 비중이 상당히 높아진 것에서 이 진법이 기본적으로 북방의 여진 기마병에 대응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위진법』에서는 기병과 보병을 각각 동일하게 편성하되 각 병종의 구성은 상당히 다양하게 편성하였다. 기병의 경우에는 전체 인원의 5분의 3은 사수(射手), 5분의 2는 창수(槍手)로 구성하도록 하였다. 보병의 경우에는 궁수(弓手), 총통수(銃筒手), 창수와 검수(劒手) 그리고 팽배수(彭排手)를 갖추되 총통수와 방패수의 인원수는 반드시 정해진 수를 따르도록 하였다. 이를 통해 기병은 사수가 중심이며, 보병의 경우에도 궁수, 총통수 등 다양한 병종으로 구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북방 기병이 주로 창과 궁시로 무장하고 소규모로 산개하여 공격하는 전법을 구사하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기병은 기사(騎射) 무예로서 대응하고 보병의 경우에도 궁수, 총통수와 같은 장병기로 무장한 병종을 중심으로 대응하는 전술을 채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오위진법』의 또 다른 특징으로는 대규모 부대의 지휘를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다량의 깃발과 징, 북[形名]을 구비하도록 한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대규모 부대 운용으로 인해 일사불란한 지휘에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이다. 아울러 이 책에서 진형은 이전과 같이 방진, 원진, 곡진, 직진, 예진의 다섯 가지가 제시되어 있지만, 부대의 규모에 따라 오위독진(五衛獨陣), 오위연진(五衛連陣), 합진(合陣)의 진형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병세의 규모와 지형에 따라 다섯 진형뿐만 아니라 장사진(長蛇陣), 학익진(鶴翼陣), 언월진(偃月陣), 어린진(魚鱗陣), 조운진(鳥雲陣) 등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다양한 진형이 활용될 수 있는 것은 당시 기병의 비중이 높아 상황에 따라 신속하게 진형을 변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변천

『오위진법』은 이후 조선군의 부대 편성과 전술의 기본적인 병서가 되었다. 따라서 조선전기에는 갑사(甲士) 등 중앙군뿐만 아니라 영진군(營鎭軍) 등 지방의 군사들도 이 『오위진법』에 따라 군사 훈련을 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7년 4월 6일). 심지어 지방군의 경우 군사의 수가 부족한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1454년(단종 2)에는 이러한 상황에 적합하게 『오위진법』을 일부 수정한 진서를 만들어 대장(大將) 밑에 2위만을 두고 위 아래에 2부, 부 아래에 2통을 두는 축소된 새로운 편제를 만들기도 하였다(『단종실록』 2년 3월 10일). 이후 한동안 새로운 진법서의 간행은 없었다. 이는 국제 정세의 안정과 함께 당시 확립된 기병 중심의 전법 체계가 여진 기병을 제압하는 데 상당히 유효하였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다만 1492년(성종 23) 8월에 1455년(세조 1)에 작은 활자로 간행된 『소자진서(小字陣書)』와 1559년(세조 4)에 큰 활자로 간행된 『대자진서(大字陣書)』의 목차 및 내용상의 차이를 서로 비교 참작하여 한 책으로 합본하는 작업이 있었던 것이 주목되는 정도이다.

『오위진법』은 임진왜란 초기 일본의 조총 및 장창을 이용한 전술에 대응하지 못함에 따라 급속히 쇠퇴하였다. 대신 조선은 명나라 척계광의 새로운 전술인 절강병법을 도입하여 『오위진법』을 대체하였다. 『오위진법』은 이후 영조대인 1742년(영조 18) 『병장도설(兵將圖說)』이라는 이름으로 복간되었다.

참고문헌

  • 『춘정집(春亭集)』
  • 『만기요람(萬機要覽)』
  • 『병장도설(兵將圖說)』
  • 정해은, 『한국 전통 병서의 이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4.
  • 윤훈표, 「조선 세종대 진법서 편찬과 훈련체계의 개편」, 『군사』81, 국방부, 2011.
  • 하차대, 「조선초기 군사정책과 진법서의 발전」, 『군사』19, 국방부,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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