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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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국왕의 초상을 그리는 일을 주관하는 임시 기구.

개설

조선시대 어진도사도감은 국왕의 얼굴인 어용(御容)을 그림으로 제작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 기구였다. 보통 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제작 방식은 세 가지가 있다. 왕이 생존해 있을 때 직접 얼굴을 보면서 그리는 도사(圖寫), 왕이 죽은 뒤 기억에 의존에 그리는 방식의 추사(追寫), 그리고 이미 완성된 그림을 본떠서 그리는 모사(模寫) 방식이다. 따라서 어용도사도감(御容圖寫都監)은 왕의 생존 시에 현존 왕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임시로 개설된 기관이었던 것이다. 구성원은 도제조를 제외하고 현직 판서급 이하로 겸직하고 판서가 유고시(有故時)에 참판이 그 직무를 대행하도록 하였다. 도제조(都提調) 1명, 도청(都廳) 2명, 기주관(記注官) 1명, 제조(提調) 3명, 낭청(郎廳) 2명, 기사관(記事官) 1명, 행좌승지(行左承旨) 1명, 가주서(假注書) 1명, 그리고 화원들로 구성되었다. 특히 화원은 주관화사(主管畵師), 동참화사(同參畵士), 수종화사(隨從畵士)로 나뉘었는데, 이들 중 주관화사가 그림 제작 전반을 지휘하며 왕의 얼굴을 그렸고, 동참화사와 수종화사는 그 외에 복식이나 채색을 담당하며 조력하는 역할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숙종의 어용을 도사한 1713년(숙종 39)의 『숙종실록』을 기준으로 어용도사도감의 주요 업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화원의 선발 및 초본(草本) 과정

어진도사도감의 화원 선발은 도화서 화원 외에도 전국에서 그림 잘 그리기로 이름난 화가인 선화자(善畵者)를 포함하여 어진을 도사할 수 있는 이를 추천한다. 먼저 재주를 겨루는 시험인 시재(試才)를 보아 합격한 자 중 선발하여 초본을 그리게 한다(『숙종실록』 39년 4월 11일). 초본 도사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줄 도급소(圖給所)가 궁내에 설치된다. 도사 시에 왕이 앉을 의자[交倚]와 돗자리[龍紋席] 등은 국왕의 의견에 따라 제조가 감독하여 마련하였다. 이렇게 물품이 모두 마련되면, 면지에 어용을 묵으로 그리는 초본을 제작하는데, 왕이 착용한 복식에 따라 원유관 또는 익선관 차림의 두 화본을 전신상으로 출초(出草)하였다(『숙종실록』 39년 4월 27일). 어진 도사를 시작하여 초본부터 정본 설채(設彩) 과정이 완료될 때까지 화원은 제조에게 알리고 제조는 국왕에게 아뢰어 왕의 승인 하에 국왕의 용모를 살펴가며 그려나간다. 초본 과정에서는 국왕의 자세, 교의, 용문석, 관복, 눈동자 등에 주의하여야 하였다.

2. 정본 설채

초본 과정이 끝나고 비단 위에 채색하는 작업은 주관화사가 주관하고 동참화사와 수종화사가 조역을 담당하였다. 묵화 초본이 완료되면 이를 비단에 올린 후 채색을 하는 설채 과정을 거치게 된다(『숙종실록』 39년 4월 21일). 설채를 진행하기에 앞서 공조는 어진에 사용할 비단을 섬세하게 직조하여 제공하였다. 용안을 도사하는 과정에서 안색이 변하는 것과 안정(眼睛)의 색을 조절하는 등 세심한 주위를 기울여야 했다. 또한 국왕이 착용한 복식의 무늬와 색채를 정확하게 묘사해야 했다.

3. 봉심(奉審)과 첨배(瞻拜)

초본 및 정본 설채 과정에서 그림을 살펴보는 일을 봉심이라 했는데, 각 과정 마다 미진한 곳을 평가하여 도사에 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진행되었다. 봉심은 국왕이 직접 거행하였고, 왕자, 종친, 2품 이상의 문무관 등이 참여하여 의견을 교환하였다. 첨배는 정본을 설채하는 과정을 마친 후 대소 신료들이 모두 어진에 첨배례를 거행하는 행사였다(『숙종실록』 39년 5월 11일).

4. 표제

정본 도사 과정을 마친 후 어진의 표제(標題)를 쓰게 된다. 표제는 직접 비단 위에 쓰기도 하고, 따로 써서 붙이기도 한다. 표제의 위치는 우측 상단에 쓰고 글씨는 국왕의 휘호(徽號)로 ‘모왕(某王) 어진’이라고 쓰고 그 밑에 연월을 쌍행(雙行)으로 기록하였다. 연호는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로 기록하였다(『숙종실록』 39년 5월 5일). 서사(書寫)는 국왕이 어필을 내리면 표제 서사관이 옮겨 적게 하거나, 조정 신하 중 글씨를 잘 쓰는 이를 선발하여 기록하게 하였다(『숙종실록』 39년 5월 9일).

5. 장황

정본 설채와 표제 서사 과정이 완료되면 이를 족자 형태로 장정하게 된다. 이는 그림 뒷면에 배접을 하면서 가끔 물로 씻어 풀기를 제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거쳐 후배(後背)를 붙이는 일이 마무리 되면 장식용 술인 유소(流蘇)를 장식하여 작업이 종결되는 데 약 10여 일이 소요된다.

6. 봉안 택일

도사의 일이 시작되면서부터 영전에 봉안할 때까지 모든 절차는 반드시 관상감의 일관이 택일한 후 실행하였다. 초본 과정을 비롯하여 정본 설채, 봉심, 장정, 첨배례, 대내이안(大內移安) 등 대소사를 택일에 의해 행하였으며, 어진 신본(新本)이 완성된 후 초본이나 구본(舊本)을 깨끗이 씻어서 묻는 세초(洗草)와 매안(埋安) 절차도 택일에 의해 시행하였다.

7. 세초 및 매안

세초와 매안은 어진을 모사한 경우는 구본, 어용을 도사한 경우는 초본을 처리하는 과정이다. 세초는 어진을 깨끗하게 씻는 것이고, 매안은 선택된 장소에 묻는 것을 일컫는다. 초본은 당연히 세초하여야 하지만 초본의 출초가 잘된 경우는 봉심할 때 ‘극초(克肖)’라 하여 세초하지 않고 작은 족자로 장황하여 궤(櫃)에 봉안한 후 궁궐 안에 보관하였다가 강화부에 따로 보관하는 경우도 있었다(『숙종실록』 39년 4월 21일). 퇴색되거나 훼손된 구본의 경우는 길일을 택일하여 매안하였는데, 어용을 도사한 후의 초본은 반드시 적당한 장소를 선정하여 세초하여 매안하였다(『숙종실록』 39년 5월 9일).

8. 논상

논상(論賞)은 모든 과정이 끝난 후 왕이 관련자들에게 상을 내리는 절차로 도감이 설치된 후 어진 도사를 위해 참여한 도감의 인원들과 이를 지원한 직조관리(織造官吏), 공장(工匠)을 대상으로 차등 있게 이루어졌다(『숙종실록』 39년 5월 22일). 제조 이상은 말 몇 필을 하사하였으며, 그 이하는 품계를 올려주었다. 주관화사는 당상관으로 승진하였고 동참화사들은 동반직(東班職)에 제수되었으며, 수종화사는 장궁일장식(上張弓一張式)이 수여되었다.

현존하는 어진 및 영정 관련 의궤

어진 및 영정 관련 의궤(儀軌)의 편자는 주로 도감(都監)이나 종친부였으며, 책 수는 소수의 2책 본의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1책이다. 국왕의 어용 도사는 영조 및 정조대에는 10년 만에 한 번씩 행해지기도 하였으나 그때마다 의궤가 제작되지는 않았으며,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등에 어진 관련 의궤가 소장되어 있다.

이들 중에 당시 국왕의 어용을 바로 그려내는 과정을 기록한 것은 1713년(숙종 39)에 행해진 숙종 어진의 제작 과정을 수록한 『어용도사도감의궤』와 1773년(영조 49)에 영조의 어진 제작 과정을 수록한 『어용도사도감의궤』, 그리고 1901년(광무 5)부터 1902년(광무 6)에 걸쳐 거행된 고종황제의 어진과 황태자 즉 순종의 예진도사(睿眞圖寫) 과정을 자세히 기록한 『어진모사도감의궤』 등 숙종과 고종·순종 어진 도사 시의 의궤 2종에 불과하다.

나머지 8종은 1688년(숙종 14) 태조의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를 비롯하여 1748년(영조 24) 『영정모사도감의궤』, 1837년(헌종 3) 태조의 『영정모사도감의궤』, 1900년(광무 4)의 『영정모사도감의궤』 등 어진의 구본을 이모(移模)하는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이를 통해 1748년에는 태조, 세조, 원종, 숙종의 어진이 보존되어 있었다는 점과 그 후 1900년의 영정 모사 시에는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문조(文祖), 헌종 등의 어진이 이모되어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01년에는 고종과 순종의 여러 영정이 또 모사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1910년 무렵에는 적어도 조선시대 제왕의 어진이 9종 이상 보존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이강칠, 「어진 도사과정에 대한 소고 -이조 숙종조를 중심으로」, 『고문화』 11, 한국대학박물관협회,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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