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태(安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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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길지를 골라 국왕 또는 원자, 세자, 왕자, 왕녀의 태를 안장하던 왕실 관행.

개설

조선왕실은 고려왕실의 전통을 계승하여 전국에서 길지를 골라 왕자녀의 태(胎)를 안장하였다. 그런데 조선전기에 태실이 하삼도에 많이 조성되면서 민폐가 커지자 영조는 1765년(영조 41) 5월 13일에 명령을 내려 왕자와 왕녀의 태는 태봉(胎峯)이 아닌 궁궐 후원의 정결한 곳에 묻되 석함도 없애고 비석도 없애게 하였다. 이후 왕자나 왕녀의 태는 창덕궁 후원에 묻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다. 민폐가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내내 안태(安胎)가 계속된 이유는 안태를 통해 새로운 생명의 만복과 왕실의 번영이 보장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내용 및 특징

이미 삼국시대에 사람은 출생 이전에 생명을 부여받은 태로 말미암아 생장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인성의 어질고 어리석음 그리고 일생의 성함과 쇠함을 모두 태가 결정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고 그런 믿음에서 안태 관행 역시 널리 퍼져 있었다. 안태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왕실의 전통으로 정착되었고, 조선왕실에도 계속 이어졌다. 조선왕실의 안태가 고려왕실의 전통을 계승했다는 증거는 첫째, 조선초기의 태실 조성 대상이 모든 왕의 자녀가 아니라 왕과 세자의 태실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점과 함께 태실이 충청, 전라, 경상의 하삼도 지역에 많이 분포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 안태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은 1392년(태조 1) 11월 27일에 정당문학권중화를 보내 경기도 양주와 광주 지역인 양광도, 경상도, 전라도에서 안태할 땅을 찾게 했다는 기사이다(『태조실록』 1년 11월 27일). 이는 당시 태조이성계의 태실이 출생지인 함경도 용연에 있었기에 이를 옮기기 위한 사전 조치였다. 권중화는 태를 묻을 장소를 탐문하는 태실증고사(胎室證考使)의 자격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는 태실 후보지를 3등급으로 나누어 물색하였다. 1등은 원자와 원손, 2등은 대군과 공주, 3등은 왕자와 옹주의 태실 후보지였다. 태조이성계의 태실은 1393년(태조 2) 1월 7일에 전라도 완산부 진동현으로 옮겨서 안치되었다(『태조실록』 2년 1월 7일). 이후 정종과 태종의 태실 역시 즉위 후에 경상도 지역으로 옮겨졌는데, 이는 왕자가 아닌 사인(舍人)으로 출생한 태조와 정종 그리고 태종의 태실이 사인의 태실이었기에 국왕의 격에 맞게 가봉(加封)하여 이장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조선 역대 국왕의 태실은 즉위 후에 가봉되는 것이 관행이었다. 왕세자의 경우 처음부터 석실을 만들고 비석과 금표를 하고 2~4명의 수호군을 두고 태실을 관리하는데, 이후 그가 국왕이 되면 주변에 석물을 추가한다. 이를 가봉한다고 한다. 국왕의 태실에는 금표를 확장하고 수호군사도 8명으로 늘렸다.

그런데 조선 건국 초창기인 태조, 정종 때에는 왕자녀의 태를 묻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 이는 당시가 왕조교체기의 혼란기였을 뿐만 아니라 궁궐에서 출생한 왕자녀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조선왕조가 안정되면서 궁궐에서 출생한 왕자녀의 태를 가안태(假安胎)하는 관행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같은 조선왕실의 안태 관행은 근본적으로 왕자녀의 출산에 수반되는 각종 절차 중 하나로 거행되었으며 그 절차와 방법은 기본적으로 『동의보감』에 근거하였다.

조선시대 왕비나 후궁의 출산 때에는 산실청이나 호산청이라는 임시 관청이 설치되었고 해산을 위한 공간으로서 산실(産室)도 설치되었다. 출산 때 받는 태는 백자 항아리에 넣어 보관하였는데, 보통 생후 3일째 또는 7일째에 태를 물로 씻는 세태(洗胎)라는 절차를 거친 후 길일을 골라 안태하였다. 조선전기 이래로 세태는 왕실뿐만 아니라 양반가에서도 행하였다. 그런데 조선전기 양반가에서의 태 처리는 본질적으로 씻는다는 면에서 왕실과 동일하였지만, 왕실에서의 세태와 비교하여 몇 가지 점에서 차이가 났다. 예컨대 이문건의 『묵재일기(黙齋日記)』에는 출산 후 바로 다음 날에 냇가에 가서 세태를 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태는 불로 태운 후 태항아리에 넣어 세태한 곳에 묻어 두었다가 3일째에 다른 곳으로 옮겨서 묻었다. 이에 비해 왕실의 경우에는 산후 3일째 또는 7일째에 길시를 골라 산실의 뒤뜰에서 세태를 하였다. 세태에 사용하는 물은 길한 방향에서 떠왔다. 물론 출산 시 태를 받아놓을 자리, 태를 씻을 물을 길어올 방향 등도 기본적으로 『동의보감』에 처방된 방법을 따랐다.

세태하는 방법도 매우 복잡하였다. 먼저 길한 방향에서 떠온 물로 태를 100번 씻은 후에 술로 다시 씻었다. 씻은 태는 양반가와 같이 태우지 않고 그대로 태항아리에 넣었다. 태를 넣을 안쪽 항아리에는 먼저 동전 하나를 넣었는데, 글자 부분이 아래로 향하도록 하였다. 안쪽 항아리의 입구는 유지와 청람(靑藍)의 면주(綿紬)로 덮고, 붉은색 끈으로 묶어서 봉하였다. 이어서 궐내에서 봉표를 내보내면 내관과 의관이 같이 앉아서 조청처럼 끈적끈적한 감당(甘糖)으로 항아리 입구를 봉한 후 바깥 항아리에 넣었다. 안쪽 항아리와 바깥 항아리는 종이와 백면(白綿)을 이용해 사이를 띄웠다. 바깥 항아리의 뚜껑을 덮은 다음에는 뚜껑의 4개 구멍 그리고 바깥 항아리의 4개 고리에 붉은색 끈을 관통시켜 묶었다. 이어서 궁 일을 맡아보는 내관인 차지내관과 의관이 서명하고 홍패를 달았는데, 여기에는 앞면에 세태 날짜와 태항아리의 주인공, 뒷면에 차지내관 이름을 썼다. 태항아리는 넓적한 독인 도두모(陶豆毛)에 넣어서 의녀가 다시 원래의 자리에 가져다 놓았는데, 안태할 때까지 그곳에 보관하였다.

태항아리는 해산 7일 후에서 석 달 이내에 길일을 골라 안태사(安胎使)가 태봉에 지정된 태실로 옮겨 봉안하였는데, 이 절차가 바로 안태였다. 특히 안태사 일행이 왕세자의 태를 봉안할 때는 그 행렬이 거창하였다. 이때 동원되는 의장에는 청양산(靑陽繖) 1개, 향정자(香亭子) 1개, 오장(烏杖) 16개 등이 포함되었다. 안태사가 지나가는 주현의 대문, 정청(正廳), 태소(胎所)에는 모두 갖가지 색실과 색종이, 색헝겊 등을 문이나 근처 길거리에 내걸어 장식하였고, 각 도 감사와 수령들은 징과 북과 의장을 마련하고 공복(公服) 차림으로 교외까지 마중 나갔다. 이에 경기, 충청, 경상 등 3도의 길가에 있는 백성들은 농사를 폐할 정도의 민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이런 민폐를 구제하기 위해 태실이 조성된 지역의 백성들에게는 행정구역을 승격시키는 등 혜택을 주기도 했다.

안태할 때의 태실 구조는 다음과 같았다. 먼저 태를 넣은 이중의 항아리를 둥그런 돌 상자에 넣고, 태의 주인공과 안태한 날짜를 쓴 지석을 석실에 같이 넣어 안장하였다. 석실 위에는 부도처럼 생긴 석물을 설치하였고, 이 석물을 보호하기 위해 석실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앞에는 비석을 세웠다. 만약 태가 왕의 것이라면, 석물과 난간을 더욱 웅장하게 만들어 다른 것과 구별되도록 하였고, 태실 주변에는 사찰과 수호군을 두어 태실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변천

조선시대 왕실의 안태를 비롯한 출산 풍속은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궁중 의학에 근거하였다. 서양의학이 들어오기 이전의 궁중 의학은 내의원의 어의들이 학습했던 한의학(韓醫學), 특히 조선후기 한의학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는 『동의보감』을 기본으로 하였다. 의학적 처방 이외에도, 출산 풍속에서는 산모의 무사출산과 신생아의 만복을 빌기 위한 각종 기복행위가 행해졌으며, 신분제하의 조선에서 산모의 지위, 출생아의 지위 등도 출산 풍속에 큰 영향을 끼쳤다.

궁중 의학에 근거했던 왕실의 출산 풍속은 조선이 유교화되면서 몇 가지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초기 왕실의 출산 풍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소격서(昭格署)와 도교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소격서가 존속하던 기간에는 소격서에서 왕실의 출산 풍속을 주관하였으며, 산실에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우는 것을 비롯하여 출생아의 만복을 기원하는 풍속이 대부분 태상노군과 같은 도교의 신을 대상으로 하였다. 출산 후의 권초제(捲草祭)도 초제의 연속이었다. 소격서가 임진왜란 후 완전히 폐지되면서 소격서에서 초제하는 것이 사라지고, 권초제도 도교의 신이 아니라 신생아의 부귀영화와 만수무강을 상징하는 쌀과 돈, 비단 등으로 그 대상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실에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우며, 출산 후에 세욕(洗浴), 세태를 행하는 것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는 조선이 유교화되면서, 공식적으로 도교의 신을 대상으로 하는 기복행위가 사라졌지만, 『동의보감』으로 대표되는 궁중 의학이 바뀐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선전기에 태실이 하삼도에 많이 조성되면서 민폐가 커지자 영조는 1765년(영조 41) 5월 13일에 명령을 내려 왕자와 왕녀의 태는 태봉이 아닌 궁궐 후원의 정결한 곳에 묻되 석함도 없애고 비석도 없애게 하였다. 이후 왕자나 왕녀의 태는 창덕궁 후원에 묻는 것이 관행으로 굳어졌지만, 왕의 태실은 그렇지 않았다.

이처럼 민폐가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내내 왕의 태실을 전국의 길지에서 골라 모신 이유는 안태가 새로운 생명의 만복과 왕실의 번영을 보장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같은 전통은 식민지 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졌다. 일제가 전국에 산재한 태실을 관리상의 이유를 들어 서삼릉(西三陵)으로 집단 이장하였고, 산실이나 세태, 안태 같은 관행을 미신이라 하여 금지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아 있는 안태 관련 문헌, 유물, 유적 등은 조선시대 안태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던 왕실 관행이었음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태봉(胎封)』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안태등록』, 민속원, 2007.
  • 국립문화재연구소, 『국역 태봉등록』, 민속원, 2006.
  • 국립문화재연구소, 『서삼릉태실』, 민속원, 1999.
  •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선왕실의 안태의례와 태실관련 의궤』, 민속원, 2006.
  •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조선의 태실』, 삼성문화인쇄, 1999.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www.history.go.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시소러스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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