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초제(捲草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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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왕실 자녀의 무병장수를 기원한 출산 의례.

개설

권초제는 출산 직후 매달아 두었던 짚자리[草席]를 7일째 되는 날에 걷어서 말아 넣은 권초함과, 특별히 마련한 쌀[命米], 돈[命正銀], 실타래[命絲], 옷감[命紬] 등을 미리 준비한 제상 위에 배치한 뒤 권초관이 분향하고 재배하는 의례이다. 왕실에서는 권초제의 헌관을 담당할 권초관을 특별히 선정하여 의례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권초제를 마친 뒤 권초함은 담당 관서의 창고에 잘 보관해 두었다. 권초제가 끝나면 왕실 여성의 출산을 돕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산실청은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수고한 관원들에 대한 포상이 이루어졌다.

연원 및 변천

왕실 자녀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례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지속적으로 행해졌지만, 그 의례 형식은 조선 전기와 후기가 다른 양상을 보였다. 조선시대 후기의 권초제는 조선 전기에 개복신초례(開福神醮禮)와 더불어 행했던 일부 의례를 변형시켜 새로 고안해 낸 것이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개복신초례의 헌관이 산실 문 위에 걸어 놓았던 쑥으로 꼰 새끼줄을 포대에 넣고 옻칠한 함에 담아 붉은 보자기에 싼 뒤, 남자아이인 경우 내자시의 창고에 보관하였으며, 여자아이인 경우 내섬시의 창고에 보관하였다. 그러나 새끼줄을 걷는 행위보다는 소격전에서 사흘 동안 행하는 개복신초례가 신생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의례 행위로 더욱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에 비해 조선시대 후기에는 소격전이 사라지면서, 산자리를 걷은 뒤 분향재배하는 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소격서에서 신생아의 의복을 노군(老君) 앞에 펼쳐 놓고 복을 구하던 조선 전기와 달리, 오래 살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목숨 명(命)’ 자를 넣어 만든 명미(命米), 명사(命絲), 명주(命紬), 명정은(命正銀)을 제상에 올렸다. 그리고 다복의 상징인 권초관이 산실 앞에 차려진 물건들 앞에서 제사를 지내는 의례로 변하였다.

선조 대에 원손이 태어났을 때 권초치제(捲草致祭)나 헌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미루어 권초제라는 용어는 선조 이후에 정착된 것으로 추정된다[『선조실록』 31년 12월 9일]. 인조 대에는 처음으로 권초관이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다(『인조실록』 14년 4월 2일). 영조는 산자리가 왕실 자녀의 기부(肌膚)를 직접 받은 것이므로 산자리를 담은 권초함을 특별히 관리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23년 4월 29일). 고종 대에는 권초함을 보관하는 권초각(捲草閣)이 따로 있었다(『고종실록』 20년 1월 23일).

절차 및 내용

권초제의 구체적인 절차는 『산실청총규』와 『호산청일기』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왕실에서는 여성이 출산한 직후에 산실에서 사용한 산자리를 걷어다가 미리 정해 둔 문에 7일 동안 매달아 두었다. 산자리 즉 초석을 매단다는 의미에서 이 문을 현초문(懸草門)이라고 불렀다. 우선 산자리를 매달아 둘 현초문을 정한 뒤, 산실을 배설하는 날 3촌 길이의 못 3개를 미리 박아 둔다. 이곳에 붉은색 끈을 드려 놓았다가 출산 직후에 산실 의관이 산자리를 받아서 붉은색 끈을 이용하여 문 위에 묶는다.

권초제를 행하기 전에 산실 앞에 지의(地衣)를 펴고, 큰 나무[馬木]를 좌우에 설치하고, 큰 나무판자를 그 위에 배설한 다음 제사에 사용할 물품을 진열한다. 모든 물품에는 목숨 명(命) 자를 붙인다. 명미는 10두씩 1포로 만들어 10포를 준비하고, 명사는 황색 명주실로 10근, 명주는 백정주로 10정, 명정은은 100냥을 준비한다. 후궁이 출산한 경우에도 물품은 동일하였으나, 다만 돈은 80냥만 사용하였다. 향로와 향합도 준비해 둔다.

일관(日官)이 정해 준 시각에 권초제를 행하는데, 권초관이 재배하고 현초문에 나아가 직접 산자리를 말아 권초함에 넣는다. 차비관이 이를 가지고 내려와 상 위에 올려놓는다. 권초관이 향안 앞에 이르러 분향례를 행하고 자리에 나아가 재배한다. 산실청의 도제조와 함께 산자리를 포대에 담아 작은 붉은색 보자기로 싸서 봉한 다음 서명을 붙인다. 차비관이 이를 가마에 앉히고 권초 행렬을 만들어 담당 관서의 창고에 보관한다. 그리고 권초제에 사용되었던 물품들은 내전으로 들인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한국학중앙연구원장서각에 소장된 『대군공주어탄생의 제(大君公主御誕生의 制)』에 따르면, 왕실에서 산자리를 매다는 것은 사가에서 대문 앞에 금줄을 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사가에서는 왼쪽으로 꼰 새끼줄에 짚, 목탄, 고추, 소나무 가지 등을 끼워 넣은 뒤 이를 대문 밖에 걸어 불결한 존재의 출입을 금하였다.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 양식이 도입되기 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출산 후 대문에 금줄을 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출산 후 삼칠일(三七日)이 지나면 이를 걷는데, 이때 비로소 산모와 신생아에 대한 금기(禁忌)가 없어진다.

그에 비해 왕실에서는 궁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었기 때문에 미리 정해 둔 현초문에 산자리를 매달아 놓고 순산했음을 표시하였다. 조선시대 전기에는 왕실에서도 새끼줄을 매달아 두었던 점을 볼 때, 새끼줄의 형식이 더욱 오래된 전통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産室廳總規』
  • 『大君公主御誕生의 制』
  • 『護産廳日記』
  • 김지영, 「조선 왕실의 출산문화 연구: 역사인류학적 접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 학위 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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