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대(獨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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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신하들이 승지(承旨)사관(史官)의 입회 없이 은밀하게 왕을 면담하고 기록을 남기지 않는 일.

개설

조선시대에는 공개 행정의 원칙을 확립하고 국왕과 신하의 비밀 접촉을 막기 위하여 신하가 임금을 알현할 때 반드시 승지와 사관이 입회하여 양자의 대화 내용을 기록하여 조보(朝報)에 올리고 사초(史草)로 남기도록 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만약 이러한 관례를 무시하고 특정 신하가 국왕을 독대(獨對)하게 되면 양자 간에 비밀 음모가 있었던 것으로 간주하여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고,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조선시대의 관료 사회에서는 독대가 크나큰 금기가 되었다. 그러나 왕의 가까운 친족이나 부마의 접견은 제한하지 않았고, 국왕이 승지나 사관을 불러 간단히 지시하는 등의 일은 독대로 간주하지 않았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신하가 은밀하게 국왕을 독대한 일은 매우 드물었으나, 조선초기에는 국왕이 세간의 여론을 파악하기 위하여 가끔 독대를 행하였고, 이를 좋게 평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7년 8월 21일). 조선중기 이후에도 몇몇 독대 사례가 있었으나 당대나 후대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그 결과는 당사자의 불행으로 귀결되었다. 중종대에는 권신 김안로가 독대를 한 적이 있었고, 효종 때는 이조 판서송시열(宋時烈)이 독대하여 북벌 정책 등을 의논하였는데, 송시열은 그 내용을 「악대설화(幄對說話)」라는 기록으로 남겼으나(『현종개수실록』 즉위년 9월 5일), 후대의 비판을 면치 못하였다.

1717년(숙종 43)에는 노론(老論)의 좌의정이이명(李頤命)이 숙종과 독대하여 세자(世子)의 교체를 논의하였다는 의심을 받았다(『숙종실록』 43년 7월 19일). 노론 측에서는 이때 숙종이 세자의 교체 의사를 강력히 표명하였으나 이이명이 그것을 만류하고 대신·중신들의 회의에서 논의할 것을 건의하였다고 전한다. 그 다음 날 숙종은 전·현직 대신들을 소집하여 회의한 끝에 세자가 정무를 대리청정(代理聽政)토록 결정하였다. 이 일 때문에 이이명은 커다란 비판을 받았고, 신임사화 때 처형되는 빌미가 되기도 하였다.

의의

조선시대에 국왕과 신하의 독대를 금기시한 전통은 국가의 모든 정사를 공개적으로 하고 음모나 중상모략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투명한 정치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이영춘, 『조선후기 왕위계승 연구』, 집문당, 199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