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릉(純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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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의 조모인 경순왕후(敬順王后) 박씨(朴氏)의 능.

개설

순릉은 조선이 개국하기 전인 고려시대에 조성되었다. 태조는 즉위한 뒤 4대 조상을 추존하고 능호를 올렸는데, 부모의 묘소는 정릉(定陵)·화릉(和陵), 조부모의 묘소는 의릉(義陵)·순릉(純陵), 증조부모의 묘소는 지릉(智陵)·숙릉(淑陵), 고조부모의 묘소는 덕릉(德陵)·안릉(安陵)이라 하였다(『태조실록』 1년 8월 8일). 이 8개의 능은 당시에 동북면 또는 함길도(현 함경도)의 8능이라 불렸다. 순릉은 처음에는 함주에 조성되었으나, 1398년(태조 6) 3월에 오늘날의 함경남도 흥남시 마전리로 옮겨졌다.

조성 경위

경순왕후 박씨는 오늘날 함경북도 경흥군인 알동(斡東) 지방의 백호(百戶)였다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증직된 박광(朴光)의 딸이다. 도조(度祖)와 결혼하여 이자흥(李子興)과 이자춘(李子春)을 낳았으며, 기일이 7월 23일이라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순릉은 원래 함주에 있었는데, 1398년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술사의 상언에 따라 8능의 제사를 담당했던 영안군(寧安君)이양우(李良祐), 즉 자신의 이복형 이원계(李元桂)의 아들을 보내 귀주 동쪽 임방(壬方) 산등성이에 이장하였다(『태조실록』 6년 3월 20일).

조성 상황

태조는 8능의 각 위치와 상태를 파악한 뒤 능마다 능지기와 수릉호(守陵戶)를 둔 것은 물론이고, 재궁을 짓기도 하였다. 순릉을 이장하여 능역을 새로이 조성할 때는 석실과 난간 등 석물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이미 장생전(長生殿)이 있는데도 선원전을 새로 세웠는데, 그 당시 공역을 관리하던 공조(工曹) 전서(典書)유한우(劉旱雨)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져 신하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변천

1418년(태종 18) 5월에 순심사(巡審使)가 함길도의 8능이 오래되어 허물어졌다고 보고하였는데, 이때 순릉을 포함한 8능이 정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왕조실록』에는 1661년(현종 2)에 순릉의 정자각에 비가 새는 곳이 있어 보수했다는 기록과 1723년(경종 3)에 불이 난 기록이 있으며, 순조가 재위한 34년 동안 10여 년 간격으로 봉분을 개수하거나 수축한 기록이 있다.

조선후기에는 1841년(헌종 7)과 1860년(철종 11)에 순릉의 능역 공사가 있었고, 고종 연간에는 즉위 1년 후부터 약 10년 주기로 순릉을 보수·관리하였다. 1901년(광무 5)에는 왕이 순릉을 포함한 함경도 8능의 표석 앞면의 글과 음기(陰記)를 친히 써서 내렸는데(『고종실록』 38년 3월 5일), 이후 5년여 동안 비각을 짓고 표석을 세우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순릉은 북한 지역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 능역 주변 사항은 알 수 없다.

관련 사항

『세종실록』「지리지」 함길도함흥부 편에는 동북면에 속한 6개 능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순릉은 부의 동쪽 33리 거리에 있는 예안부감산(坎山)에 있고, 의릉은 부에서 동쪽으로 14리 떨어진 예안부건술산(乾戌山)에 자리하였는데, 모두 임방(壬方)을 등지고 병방(丙方)을 향한 방향, 즉 서북쪽을 등지고 동남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되었다. 18세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해동지도(海東地圖)』와 『광여도(廣輿圖)』의 함흥부 지도를 보면, 산줄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각각 위치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광명사(廣明寺)는 고려시대인 922년(고려 태조 5)에 창건된 사찰로, 순릉을 천장하기 전에 태조가 경순왕후의 기일에 승려 500명에게 공양한 곳이다. 1424년(세종 6)에 다른 능과 더불어 순릉의 재궁을 수호하는 승려들에게 급여를 주었는데, 광명사도 이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 『북도릉전지(北道陵殿誌)』
  • 『북로릉전지(北路陵殿誌)』
  •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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