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진(忠州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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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충주진 |
한글표제 | 충주진 |
한자표제 | 忠州鎭 |
상위어 | 주진(主鎭), 병영(兵營), 순영(巡營) |
하위어 | 제진(諸鎭), 속읍(屬邑) |
동의어 | 거진(巨鎭), 충주진관(忠州鎭管), 충주진영(忠州鎭營), 충주토포영(忠州討捕營) |
관련어 | 병마첨절제사討捕營) , 충주영장(忠州營將), 충주토포사(忠州討捕使),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衛), 순찰사(巡察使)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충주진(忠州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현종개수실록』 4년 11월 14일 |
조선시대 충청도 충주목에 설치한 육군의 거진으로, 전기에는 충주진관, 후기에는 충주진영으로도 불림.
개설
충주진은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될 때 충청도 육군의 거진(巨鎭)으로 설치되었다. 충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하여 평시에는 제진(諸鎭) 군병의 훈련과 점검을 담당하고, 유사시에는 충주진관(忠州鎭管)을 중심으로 방어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과 진관체제(鎭管體制)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정부가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혁하는 가운데 충주진영(忠州鎭營)도 설치되었다. 충주진영의 군병은 『여지도서』에 의하면 4,447명이었다.
충주진영에서는 속읍(屬邑) 군병의 훈련과 점검을 담당하였고, 남한산성과 조령을 방어하였다. 또한 도적 체포 등 치안도 담당하면서 수재(水災)가 심한 해에는 대민지원(對民支援)에도 나섰다.
충주진영은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전기에 충주진관은 충청도의 거진으로서, 군익도(軍翼道)체제를 대신하여 1457년(세조 3) 진관체제가 시행되면서 설립되었다. 진관체제는 군익도의 ‘도’가 행정구역의 도와 혼동되는 것을 막고, ‘도’라는 지역적 성격보다 ‘진’이 갖는 군사기지의 성격을 분명히 하려는 것 등을 목표로 시행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충주진영으로서, 임진왜란 초기 육지 전투에서 조선군이 일본군의 조총과 수령이 육군의 군사 지휘관을 겸임한 진관체제의 문제점 등으로 고전하자 이를 시정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즉 정부는 명나라의 병서(兵書) 『기효신서』를 도입하여 포수 중심의 삼수병(三手兵)을 육성하고 군대의 편제도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로 바꾸었다. 더불어 영장을 파견하여 수령 대신 군병을 지휘하게 하는 등, 1594년(선조 27)부터 지방군을 개편하는 가운데 충주진영도 설치되었다.
조직 및 역할
충청도의 거진으로서 조선초기의 충주진관은 충주목사가 병마첨절제사를 겸임하여, ‘청풍, 단양, 괴산, 충주, 연풍, 음성, 영춘, 제천’ 등 제진(諸鎭)의 훈련과 점검을 담당하였다. 또한 유사시에는 제진의 군병을 집결시켜 충주진관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충청도 후영(後營)으로서 조선전기의 충주진 역할을 대신하였는데, 속읍은 충주진관의 제진과 같았다. 건물로는 『호서읍지』에 따르면 ‘동헌 21칸, 군뇌청 12칸, 폐문루·내아 각각 8칸, 장청·영리청 각각 7칸, 집사청 5칸, 삼문칸·수직방·교사청 각각 4칸, 책방·급창방 각각 3칸’이 있었다.
충주진의 군병은 ‘별장 2명, 천총 3명, 파총 6명, 초관 31명, 지구관 2명, 기패관 60명, 교사 30명, 훈도 10명, 마병 617명, 보군 3,686명’ 등 4,447명이었다.
진영에서 사용하는 종이 구입비 59냥 5전은 속읍에 부과하였지만, ‘영장 일행의 급료 84섬을 비롯한 반찬값 등 대부분의 재원은 충주목이 마련하였다.
충주진영은 영장이 관할 지역을 순회하면서 속읍 속오군 등의 훈련과 무기·복장 상태를 점검하였다. 수도 외곽 방어와 직결되는 왕의 피난처 남한산성을 수호하였으며, 유사시 일본군의 서울 진격을 조령에서 막아내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1665년(현종 6) 충주영장이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자 충주진영은 토포영으로서 ‘도적 체포, 천주교도 체포와 처형’ 등 치안도 담당하였다. 수재가 심각했던 1810~1859년에는 조련이나 점검 대신 둑을 쌓는 등 대민지원에도 나섰다.
변천
조선전기의 충주진관은 임진왜란 중에 진영제도가 실시됨으로써 조선후기에 충주진영으로 바뀌었다. 1654년(효종 5) 이후 충주진영에 영장을 파견하는 것이 확정되자 충주목사의 속읍 군사 지휘권이 청주영장에게 넘어갔다.
충주진영은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난 뒤 남한산성에 소속되었다가, 이완(李浣)이 수어사였을 때 조령을 방어하기 위해 남한산성 소속 영진(營鎭)에서 제외되었다(『현종개수실록』 4년 11월 14일). 1663년(현종 4) 시행된 남한산성 4영 3부제에서 충주진영 이름이 나오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청주진영은 1665년 토포영이 되어 치안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호서읍지(湖西邑誌)』
- 『양역실총(良役實總)』
- 『부역실총(賦役實總)』
- 『기효신서(紀效新書)』
- 김우철, 『조선후기 지방군제사』, 경인문화사, 2001.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영장제를 중심으로-』, 혜안, 1999.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서태원, 「조선후기 청주진영연구」, 『호서사학』42, 2005.
- 서태원, 「조선후기 해미진영연구」, 『역사교육』92, 2004.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