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진(楊州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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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기도의 양주 지역에 설치한 지방 방위 조직인 진관.

개설

태조대 한양으로 도읍지를 옮기면서, 전부터 그곳에 살고 있던 아전과 주민을 견주(見州)로 이주시키고 견주를 양주군으로 개칭하였다. 양주군은 곧 부(府)로 승격하였으며, 세조대 군익도(軍翼道)체제를 전국으로 확대했을 때 양주도(楊州道)가 설치되었다. 곧이어 진관(鎭管)체제로 개편하면서 비로소 양주진이 성립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 방어영이 설치되었으나 광주로 이전되었다. 도성의 방위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세운 수어청(守禦廳)의 중진영장(中鎭營將)을 맡았다. 전에 속했던 파주가 목(牧)으로 승격되어 방어영을 두면서 양주진에서 제외되는 것을 계기로 소속진의 변동이 있었다. 하지만 기본 골격은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은 수도를 개경(開京)에서 한양부(漢陽府)로 옮겨 한성부(漢城府)로 이름을 고치고, 원래 살고 있던 아전들과 주민들을 견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견주를 양주군(楊州郡)으로 개칭했다. 조금 뒤에 부양주로 승격시키고, 1419년(세종 1)에 포천(抱川)의 속현(屬縣)이었던 풍양(豐壤)을 병합했다.

1455년(세조 1)에 양계(兩界) 지역에 설치되었던 군익도체제를 전국으로 확장하면서 연해뿐만 아니라 내륙에도 거진(巨鎭)을 두고 주변 고을을 분속시켰다. 이때 양주도가 설치되어 그 중익(中翼)을 양주·원평(原平)·포천·적성(積城)·가평으로 정하고, 좌익(左翼)을 삭녕(朔寧)·마전(麻田)·영평(永平)·연천(漣川)으로, 우익(右翼)은 풍덕(豊德)·장단(長湍)·임진(臨津)·임강(臨江)으로 정하였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군익도체제를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제도(諸道)의 중익·좌익·우익을 혁파하는 대신 주요 지역을 거진으로 삼고, 주변의 제진(諸鎭)을 그 휘하에 소속시켰다. 이때 비로소 양주진이 성립되었다. 연천·마전·적성·원평·교하(交河)·고양(高陽)·수평(水平)·포천·가평이 양주진에 소속되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이로써 양주도에 속해 있던 진 가운데 장단진 등이 빠져나갔음을 알 수 있다. 1466년(세조 12)에 양주도호부에서 양주목으로 격상되었는데, 그 뒤에 일부 고을이 변동되었고, 그 결과가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수록되었다.

조직 및 역할

『경국대전』에 따르면 정3품의 양주목사가 종3품의 병마첨절제사를 겸하면서 진관을 통솔하였다. 그에 소속된 파주에서는 부사가, 고양에서는 군수가 종4품의 병마동첨절제사를, 영평에서는 현령이, 포천·적성·교하·가평에서는 현감이 종6품의 병마절제도위를 겸하였다. 대체로 경기도 중북부 일대의 진들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중앙에 올라가 대열(大閱) 등에 참가했을 때에는 오위(五衛)에 소속되는데, 중위(中衛)였던 의흥위(義興衛)의 중부(中部)에 속하였다.

변천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한성이 일본군에게 함락당할 즈음에 양주목사고언백(高彦伯)이 경기방어사를 겸하면서 많은 공을 세웠다(『선조실록』 25년 12월 27일). 이를 계기로 방어영이 설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뒤에 광주(廣州)로 옮겼다(『정조실록』 10년 3월 15일).

인조반정 이후에 도성 방위를 강화한다는 명목으로 1624년(인조 2) 총융청을 설치하여 경기도병마절도사 대신 경기도 병력을 거느리게 했다. 그 뒤 남한산성을 진(鎭)으로 삼는 수어청이 설립되자 이속되었다(『현종개수실록』 4년 11월 14일). 이에 수어청의 좌영(左營)이 되었는데, 1687년(숙종 13) 김수흥(金壽興)의 건의에 따라 총융청으로 옮겼다가 1689년에 수영청에 환속되었다(『숙종실록』 15년 9월 7일). 『속대전』과 같은 시기에 편찬된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에 따르면 수어청의 중진영장을 맡았다.

파주가 목으로 승격되어 목사가 방어사를 겸하게 되자 진관에서 제외되면서 양주진의 소속 제진에도 변화가 생겼다. 먼저 『속대전』에 따르면, 교하와 가평이 군으로 격상됨으로써 그 군수들이 병마동첨절제사를 겸하게 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마찬가지로 영평도 군으로 승격되어 군수가 병마동첨절제사를 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머지 고양이나 포천·적성은 변화가 없었다.

개항 이후에 군제를 신식으로 개편하고자 하는 가운데 임오군란을 당하여 청나라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종래의 5군영 체제를 청군의 협조를 받아 새롭게 친군영제(親軍營制)로 바꾸었다. 그 책임자를 전·좌·우·후 영사(營使)로 명명했다. 그 과정에서 양주가 기보(畿輔) 가운데 최고 요새지라는 이유로 대포를 설치하고 효율적 훈련을 위해 좌영사(左營使)가 관할하게 했다(『고종실록』 22년 8월 25일).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군영제가 변개되고 다시 3영체제로 변통되면서 양주의 대포 설치와 좌영사 관할 계획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 서태원, 『조선후기 지방군제연구』, 혜안, 1999.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전기편 -』, 1968
  • 육군본부,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 1977.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6.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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