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병영(南兵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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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 북청에 설치한 병마절도사영.

개설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은 조선시대 각 도의 육군을 통솔하는 사령관인 종2품 병마절도사가 군진(軍陣)을 설치하여 주둔한 곳이다. 변경 지역인 함경도에는 함흥감영(監營)에 있는 관찰사가 병마절도사직을 겸직하는 한편, 전임직(專任職) 병마절도사 두 명이 경성(鏡城)과 북청(北靑)에 주둔하였다. 전자를 북병영, 후자를 남병영이라 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466년(세조 12)에 전국의 지방 군사조직을 진관체제로 개편하면서, 각 요충지에 진을 설치하고 병마절도부사(兵馬節度副使)를 두어 부사(副使)로 하여금 겸직하게 하였다. 이듬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한 뒤에 함경도의 남도와 북도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는 이유로 북청을 병영으로 승격시켜 남병영을 설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함경남도 지역 방어의 거점으로서, 남병영을 지키는 남도병마절도사를 약칭하여 남병사(南兵使)라고 불렀는데 함경남도수군절도사(咸鏡南道水軍節度使)를 당연직으로 겸직하였다. 참모격인 종3품 병마우후(兵馬虞候) 1명을 비롯하여 종9품의 외관직인 심약(審藥) 1명 등의 품관이 배속되었고, 각급의 군관과 수백 명의 직속 병력도 배치되었다. 그 밖에 아전 무리와 공장(工匠), 노비 등도 소속되어 있었다. 남병영의 소속 지역은 갑산·안변·삼수·혜산·낭성포·도안포·영흥·북청·단천·장진·원주 등이었고 그 이북은 북병영에 속하였다. 이 밖에 행영(行營)이라고 하는 이동 사령부가 설치되어 남병사가 휘하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 순회하며 주둔하기도 하였다. 관할 구역을 지나는 봉화(烽火)의 관리도 주요한 임무였으며, 벚나무 껍질[樺皮], 녹용 등을 중앙에 공급하기도 하였다. 군비에 소모되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막대한 관곡이 환곡(還穀) 등으로 운영되거나 군대의 식량으로 비축되었다.

변천

성종대부터는 남병사로 하여금 북청부사(北靑府使)를 겸직하게 하였다(『성종실록』1년 2월 24일). 1509년(중종 4)에는 수군절도사의 겸직을 폐지하였다가 후일 다시 설치하였다. 1884년(고종 21)에는 남병영 일대의 전략적 가치가 증대함에 따라 남병사를 격상시켜 함경남도통어사(咸鏡南道統御使)로 변경하였다가 복원하기도 하였다(『고종실록』21년 8월 8일), (『고종실록』24년 12월 19일). 1684년(숙종 10)에는 함경도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활쏘기와 말타기를 잘하고 힘이 센 자 600명을 선발하여 친기위(親騎衛)라는 부대를 신설하였다. 초기에는 남병영에 속해 있는 6읍에서 150명을 선발하였는데, 이후 1,000명까지 늘어났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홍재전서(弘齋全書)』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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