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마아청(能麽兒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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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무관(武官)의 병학(兵學) 시험을 관장하던 관청.

개설

능마아청은 1629년(인조 7) 이귀(李貴)의 건의로 무관에게 진법(陣法)을 익히게 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속대전』에서는 산직청(散職廳)으로 정비되었다가 1765년(영조 41)에 훈련원과 통합되었다. 당상관(堂上官) 3명, 낭청(郞廳) 4명이 배속되었는데 당상관 1명은 훈련원 도정(都正)이, 낭청 2명은 훈련원 습독관(習讀官)이 겸하였다. 매달 여섯 차례, 병서(兵書) 강독 시험인 능마아강(能麽兒講)을 주관했으며 분기마다 시험 성적을 모아 병조(兵曹)에 보고하였다. 강서(講書) 교재는 주로 『병학지남(兵學指南)』을 사용하였다.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1629년 병조 판서이귀와 이서(李曙)의 건의로 무관에게 무예나 진법 등 전문적인 병학을 익히게 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인조 즉위 후 북방에서 후금의 세력이 커지자 후금의 기병에 대처하기 위해 진법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무관에게 전문적으로 병법 교육을 시행하기 위해 이를 전담할 기관으로 능마아청을 설치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훈련원의 낭청, 내금위(內禁衛)·겸사복(兼司僕)·우림위(羽林衛)에 속한 금군(禁軍), 각 대장의 군관 등에게 병학 교육을 실시한 후 시험을 실시하였다. 나무를 깎아 허수아비를 만들어 진(陣)의 형세로 배치한 후 매달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에 한곳에 모여 그동안 학습한 내용을 뽑아 시험을 실시하였다. 시험 결과에 따라 금군이면 근무 일수를 더해 주고, 금군이 아니면 1년을 합산하여 등급을 나누어 시상하였다. 성적이 부진하면 실직(實職)을 가진 사람은 체직(遞職)시키고, 금군과 훈련원 봉사(奉事) 이하는 그동안 근무한 일수를 깎아 더 근무하도록 조치하였다.

조직 및 역할

관원으로 당상관 3명, 낭청 4명이 배속되었다. 당상관 1명은 훈련원 도정이, 낭청 2명은 훈련원 습독관이 겸하였다. 참하관(參下官)의 임기는 1,350일로 근무 일수를 채우면 고강(考講)을 거쳐 6품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영조대에는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중군(中軍)이 당상관을 겸하도록 하였다. 주요 임무는 능마아강을 주관하는 일이었다. 인조대에는 무관에게 병학을 교육시키기도 했으나 50세 이하의 무관을 대상으로 매월 여섯 차례 시험을 보게 하고 3·6·9·12월의 분기마다 시험 성적을 모아 병조에 보고하였다. 시험 과목으로 영조대부터 『병학지남』을 사용했으며 『대전통편』에서 법제화되었다.

한편, 1664년(현종 5)에는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다시 간행할 때 능마아청 당상관들이 『기효신서』의 이본(異本)들과 대조해 오류를 수정했다고 하였다. 이것을 통해 당상관들이 병학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조선왕조실록』에서 능마아청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1629년 1월이나, 이미 1628년부터 ‘능마아’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있다. 병학을 진작(振作)하기 위해 설치된 능마아청은 한때 유명무실화되었으나 1654년(효종 5)에 재정비되었다. 그 후 『속대전』에 산직청(散職廳)으로 법제화되었다가 1765년 홍봉한(洪鳳漢)의 건의로 훈련원과 통합되었다. 그 후 조직도 다소 변하여 1796년(정조 20)에는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의 중군이 당상관을 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낭청 2명은 중인(中人)이나 서얼(庶孼) 가운데 나이가 30세가 찬 사람을 임명하였다. 1850년(철종 1)에는 훈련원 습독관이 으레 겸하던 낭청 자리 하나를 6품 자리로 만들어 참하관을 역임한 사람 가운데 골라서 임용하였다. 1882년(고종 19) 정부 기구의 축소와 감원을 관장하던 감생청(減省廳)의 건의로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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