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위영(禁衛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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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중앙에 설치한 군영(軍營).

개설

인조 때 기병(騎兵) 가운데서 우수한 자를 선발하여 병조 소속으로 두었던 정초군(精抄軍)훈련도감(訓鍊都監)의 급료병(給料兵)을 줄이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통합하여 1682년(숙종 8)에 설치되었다. 그 당시 훈련대장과 병조 판서를 겸하였던 김석주(金錫冑)의 건주(建奏)에 의해 이루어졌다.

처음부터 독립된 군영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니며, 병조 판서가 대장직을 겸하여 실질적으로는 병조의 수중에 있었다. 1754년(영조 30)에 별도로 대장을 설치하여 독립된 군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에 의거하여 숙위와 수도 방어에서 중요한 군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1704년(숙종 30)의 군제 변통으로 1영(營) 5부 25사 125초의 향군(鄕軍) 번상숙위제도로 정비되었다. 이는 어영청(御營廳)의 그것과 비슷했다. 운영은 보(保)에 의해 이루어져 많을 때는 9만 명에 달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보인의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였다.

고종의 친정 체계의 강화에 따른 군사제도의 개편과 신식 군대의 도입 등으로 말미암아 1881년(고종 18) 새로 설치된 장어영(壯禦營)으로 흡수 통합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궁핍한 국가 재정과 극심한 양역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군제변통(軍制變通)·양역변통(良役變通)의 논의가 그 절정에 달했던 1682년에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설치하였다. 정초군은 인조 때 병조 소속의 각 번 기병 가운데 우수한 자를 뽑아서 조직하였다. 병조에 직속되어 특히 숙위 근무에 투입되었다. 훈련별대는 급료병으로 구성되어 국가 재정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던 훈련도감을 대체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하지만 군영과 군액의 확장으로 국가 재정의 부담이 가중되자 이것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당쟁의 격화로 인한 정치적인 불안과 북벌 등을 이유로 그대로 유지해야 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와 같은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숙종 때 논란이 되었던 훈련도감의 군액 감축과 양역변통이란 명목을 바탕에 깔고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합쳐 번상군으로 운영하는 금위영을 설치하였다. 그 작업은 그 당시 훈련대장과 병조 판서를 겸하여 실질적으로 군권을 좌우했던 김석주가 주도하였다. 초창기의 편제는 5부(部) 20사(司) 105초(哨)로 구성되었는데 곧이어 5부 25사 별2사 135초 별중 1초로 확대되었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실질적으로 독립된 군영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1754년에 병조 판서가 겸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로 대장을 설치하였던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조직 편제도 1704년에 어영청의 그것과 유사하게 1영 5부 25사 125초의 향군 번상숙위제도로 정비되었다. 이에 힘입어 숙위와 수도 방어에서 중요한 군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휘 체계를 보면, 최고 책임자에 해당하는 정1품 도제조(都提調) 1명, 병조 판서가 으레 겸임하는 정2품 제조(提調) 1명이 있으며, 실질적인 책임자인 종2품 대장 1명, 군사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종2품 중군(中軍) 1명, 정3품 별장(別將) 1명, 정3품 천총(千摠) 4명, 정3품 기사장(騎士將) 3명, 종4품 파총(把摠) 5명, 문경 등의 수령이 겸임하는 종4품 외방겸파총(外方兼把摠) 12명, 하급부대 지휘관이었던 종9품 초관(哨官) 41명이 있었는데 여기까지가 지휘부에 속했다.

이 외에 종6품 종사관(從事官) 문·무관 각 1명씩을 두어서 군무를 관장하도록 했다. 교련관(敎鍊官) 12명, 기패관(旗牌官) 10명을 두어 군사훈련을 담당하도록 했다. 별무사(別武士) 30명, 군관(軍官) 5명,별군관(別軍官)10명, 권무군관(勸武軍官) 50명, 기사(騎士) 150명,별기위(別騎衛) 32명 등의 장교급 인원들이 배치되었다.

병력으로는 기사(騎士), 향군(鄕軍), 표하군(標下軍), 그리고 기타 여러 부류로 구분된다. 설치 당시의 향군은 보병이었다. 그 후 마병(馬兵)으로 해서별효위(海西別驍衛)가 성립되었고, 다시 숙위기사(宿衛騎士)로 바뀌었다가 기사(騎士)로 되었다. 향군은 6도 고을에서 번상하였다. 표하군은 군사 활동보다 각종 잡무에 종사하였다. 이 외에도 별파진(別破陣) 등의 군사들도 있었다.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몇 차례 정원에 변화가 있었다.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본영(本營) 이외에 남별영(南別營)·서영(西營)·남영(南營) 등의 영사(營司)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양향(糧餉)을 저장하는 남창(南倉)·하남창(下南倉) 등도 두었으며 약방(藥房)·직방(直房) 등도 있었다.

의의

급료병인 훈련도감의 감축 내지 혁파를 전제로 하고 국가 재정을 건전하게 만들고 수도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이로 인해 어영청과 비슷하게 번상제 같은 구래의 운영 모습을 많이 간직하였다. 이로써 조선후기 군영 운영의 실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만기요람(萬機要覽)』
  • 車文燮, 『朝鮮時代軍事關係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96.
  • 車文燮, 『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學校出版部, 1973.
  • 吳宗祿, 「중앙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 『조선정치사 1800∼1863㈛』, 청년사, 1990.
  • 陸軍士官學校 韓國軍事硏究室, 『韓國軍制史 - 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77.
  • 윤훈표, 「조선후기 동궐의 宿衛 체계의 변화」, 『서울학연구』30, 2008.
  • 李泰鎭, 『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 變遷』, 韓國硏究院, 1985.
  • 崔孝軾, 「御營廳·禁衛營의 比較硏究 - 주로 由來 組織 編制를 中心으로」, 『慶州史學』1,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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