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일암(遮日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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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한 뒤 사초(史草) 등 참고 기록을 세초하던 바위.

개설

차일암(遮日巖)은 창의문 밖 탕춘대 앞에 계류를 끼고 있는 넓직한 바위인데, 이곳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완성한 후 비밀 보장과 종이 재활용을 위한 세초(洗草)가 행해졌다. 『조선왕조실록』을 편찬하여 인출(印出)한 후에 실록청의 총재관 이하 모든 관원들은 창의문 밖 차일암으로 가서 『조선왕조실록』 초본(抄本)과 그 편찬에 활용된 사료를 잘라서 망과 가마니에 넣은 후 물에 담가 먹의 흔적을 씻어 낸 후 해당 관아로 보냈다. 차일암은 세초 후에 왕이 내린 선온(宣醞)을 가지고 잔치를 여는 마당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차일암은 곧 그 의례와 연행(燕行)의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현종개수실록』 2년 윤7월 2일).

명칭 유래

여지도(輿地圖)』 중 「도성도(都城圖)」에는 탕춘대를 중심으로 좌우에 세검정과 조지서가 위치하고 있다. 탕춘대(蕩春臺)는 백악산(白岳山) 계곡을 따라 내려와 홍제천 가에 너럭바위가 펼쳐진 곳으로, 세검정과 조지서는 홍제천을 사이에 두고 탕춘대 건너편에 있는 셈이다. 이 바위 위에는 차일(遮日)을 치기 위에 구멍을 뚫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차일암의 명칭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조선시대 세초를 행한 장소인 차일암은 바로 이 탕춘대 일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탕춘대의 너럭바위와 홍제천의 풍부한 수량은 세초하기가 적합한 장소였다. 세초하는 날 거행하는 선온연은 이 세검정 아래에서 거행되었다(『숙종실록』 3년 9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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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환경

차일암이 있는 탕춘대 주변에는 조지서(造紙署)와 세검정(洗劍亭)이 있었다. 조지서는 창의문 밖 탕춘대의 동북쪽, 현재 상명대학교에서 구기동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었다. 공조(工曹)의 속아문이었던 조지서는 국초에 처음 설치하여 표문(表文)·전문(箋文)·자문(咨文)에 쓸 종이를 위시하여 각종 종이 생산을 관장하였다. 탕춘대 앞에는 홍제천(弘濟川)과 반석이 있어 종이 만들기에 마땅하여 나중에는 이곳에 조지서를 두었다. 탕춘대 부근에 민가 수백 호가 있었는데 반석과 물을 이용해 종이 만드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세검정은 탕춘대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바위 위에 정자를 세웠는데 동령(東嶺) 폭포의 물이 그 앞을 흘러 지나간다. 매번 장마로 물이 불어날 때는 성 안 사람들이 나가서 불어난 물을 구경하였다고 한다. 정자 앞 반석은 물살에 닳아 반들반들하고 깨끗하기가 흰 명주와 같았으며, 이 반석에서 여염집 아이들이 붓을 가져와 글씨 쓰기를 연습하기 때문에 반석 위는 항상 먹물이 밴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차일암 주변의 수려한 경관은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에 잘 나타나 있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경종대왕실록산절청등록(景宗大王實錄刪節廳謄錄)』
  • 『영종대왕실록청의궤(英宗大王實錄廳儀軌)』
  • 『한경지략(漢京識略)』
  • 『순종대왕실록청의궤(純宗大王實錄廳儀軌)』
  • 오항녕 역, 『(국역)영종대왕실록청의궤 (상)』, 민족문화추진회, 2007.
  • 오항녕 역, 『(국역)영종대왕실록청의궤 (하)』, 민족문화추진회, 2008.
  • 오항녕 역, 『(역주)선조실록수정청의궤』, 일지사, 2004.
  • 신병주, 「‘실록형지안’을 통해 본 『조선왕조실록』의 관리 체계」, 『국사관논총』102, 2003.
  • 신병주, 「『조선왕조실록』의 봉안의식과 관리」, 『한국사연구』115, 2001.
  • 오항녕, 「실록-등록(謄錄)의 위계(位階)」, 『기록학연구』3, 2001.
  • 오항녕, 「실록의 의례성에 대한 연구-상징성과 편찬관례의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26, 2003.
  • 조계영, 「조선시대 실록부록의 편찬과 보존-『단종대왕실록부록』을 중심으로」, 『한국문화』62,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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