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도(都城圖)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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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도성도 |
한글표제 | 도성도 |
한자표제 | 都城圖 |
대역어 | 경도도(京都圖), 경조도(京兆圖), 수선도(首善圖) |
관련어 | 면조후시(面朝後市), 종묘사직형세지도(宗廟社稷形勢地圖), 좌묘우사(左廟右社) |
분야 | 문화/예술/미술 |
유형 | 개념용어 |
집필자 | 정은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도성도(都城圖)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2년 2월 10일, 『태조실록』 3년 9월 9일, 『세종실록』 15년 7월 9일, 『단종실록』 2년 4월 17일, 『세조실록』 13년 10월 13일, 『세조실록』 13년 3월 18일, 『숙종실록』 30년 2월 15일 |
한양의 산수와 성곽을 배경으로 궁궐과 종묘와 사직, 시가지 등의 형세를 그린 고지도.
개설
한양의 도성 건설은 중국 고대 도시 조성의 기본 원리를 보여주는 사료인 『주례(周禮)』「고공기(考工記)」의 면조후시(面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제도를 따라 이루어졌다. 면조후시는 궁궐을 기준으로 삼아 앞으로는 조정이 있고, 뒤로는 시전을 두는 것이며, 좌묘우사는 궁궐의 왼쪽으로는 종묘, 오른쪽으로는 사직을 배치하는 방식을 말한다. 이러한 원칙을 기준으로 해서 궁궐, 종묘, 사직, 도로 등의 설계를 어느 정도 마친 후 상세 도면을 작성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즉, 주산인 북악산 아래 궁궐터를 정하고, 정궁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에 종묘를 두고, 오른쪽에는 사직단(社稷壇)을 두었다. 또한 면조후시의 원칙에 따라 육조 관아를 궁궐 앞에 배치하였다. 시장은 궁성 뒤쪽, 즉 북쪽에 있어야 하지만, 궁성이 북악산 앞에 자리한 관계로 궁성의 전면에서 동쪽으로 비껴간 곳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조선시대 도성도는 대체로 고대 도시 조성의 기본 원리를 충실히 반영하여 그려졌다. 특히 도성을 둘러싼 산세 표현은 사방으로 펼쳐진 개화식(開花式) 산수화법으로 그린 반면, 도성 내부는 비교적 좁은 지역을 크고 자세하게 묘사하는 대축척(大縮尺)을 이용하여 행정구역과 도로 상황 등을 보다 상세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 도성도는 한양의 도시 형성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393년(태조 2)에 권중화가 태조에게 새 도읍의 종묘·사직·궁궐·시가지의 형세도를 바쳤으며(『태조실록』 2년 2월 10일), 1394년 9월에 한양으로 천도가 결정되면서 새로운 수도 건설에 필요한 도시 구상을 위해 도면 형식으로 제작되었다(『태조실록』 3년 9월 9일). 태조가 한양 천도를 명한 이후 태종대 재천도까지 13년 동안 도성의 입지 선정 과정에는 풍수지리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433년(세종 15)에는 영의정황희 등이 목멱산에 올라 산수의 내맥(來脈)을 탐지한 후, 화공을 시켜 삼각산의 지형을 그리게 하여 세종에게 올렸다(『세종실록』 15년 7월 9일). 이후 1454년(단종 2) 4월에는 수양대군이 도성도 제작을 적극적으로 논하였는데, 지리에 밝은 예조 참판정척, 직전(直殿)양성지, 땅을 잘 보는 상지안효례 외에도 거리를 계산하기 위해 산사(算士)인 박수미를 대동하여 삼각산과 보현봉에 올라가서 산의 형상과 물줄기를 살펴 정하고, 도성도 초본을 그리게 하였다(『단종실록』 2년 4월 17일). 이때 그림을 잘 그렸던 집현전 직제학강희안 외에 화원 안귀생의 동행은 도성지도 제작에서 화원의 역할과 비중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이다.
1467년(세조 13)에는 이익배, 관상감 정안효례 등에게 도성을 척량(尺量)하여 지도를 제작한 사례가 있어 주목된다(『세조실록』 13년 10월 13일). 당시 세조가 지도 제작에 앞서 이들에게 영릉(英陵)에 가서 측량 기구인 인지의(印地儀)를 이용하여 땅을 측량하는 것을 시험하게 한 것을 볼 때 계획적인 도성도 제작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세조실록』 13년 3월 18일). 앞서 터를 잡을 때는 상지와 산사 등 풍수적 입지 조성을 위해 필요한 인력을 동원하였고, 입지를 선정한 후에는 측량을 통해 도성 내 건물이나 도로 등을 계획적으로 조성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후 1560년(명종 15) 명종은 한양의 성곽과 궁궐의 형상을 본떠 한양궁궐도가 병풍 형식으로 완성되자 정사룡과 홍섬에게 각각 기문과 시를 짓게 하였다. 이 지도에는 도성의 산세는 물론 경복궁의 사정전·근정전·경회루, 창덕궁, 창경궁 등 궁궐과 궁궐의 주요 건물의 명칭까지 상세하게 기록하였고, 앞서 도면이나 측량 지도의 규모에 비해 대형으로 제작할 수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정보를 담은 지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산성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지도를 통해 산성의 수축 상태를 점검하였으며, 숙종대 도성의 수축과 북한산성 축조라는 대규모 역사는 도성도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도성 수축을 위한 구체적 논의를 위해 1704년(숙종 30) 2월 15일 한성부 좌윤윤취상과 훈련대장이기하가 왕명을 받들어 도형을 그려 바쳤고, 1710년(숙종 36) 12월에 우의정김창집이 1704년 도형을 보충하여 다시 도본을 바친 것이 대표적 예이다(『숙종실록』 30년 2월 15일). 1712년 북한산성이 축성되고, 1713년 행궁을 비롯한 관아 건물이 준공된 이후에도 여러 점의 북한산성도가 제작되었다. 이후 1745년(영조 21) 도성의 성첩을 수축하여 도형을 올리도록 하는 등 18세기 이후 북한산성과 관련하여 다수의 지도가 제작되었다. 북한산성과 관련하여 제작된 지도로는 1745년의 『북한지』 「북한도」, 1751년(영조 27)의 「어제삼군문분계지도」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호음잡고(湖陰雜稿)』
- 『인재집(忍齋集)』
- 고동환, 『조선시대 서울도시사』, 태학사, 2007.
- 한국고지도집 편찬위원회, 『국토의 표상』, 동북아역사재단, 2011.
- 오종록, 「한국 중세의 수도와 천도; 조선초엽 한양 정도 과정과 수도 방위」, 『한국사연구』 127, 한국사연구회,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