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융대장(摠戎大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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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오군영의 하나로 인조대에 설치한 총융청의 최고책임자.

내용

1624년(인조 2) 총융청이 창설되었으며 완풍부원군(完豐府院君) 이서(李曙)가 총융사(摠戎使)로 임명되었다. 총융청은 사직동(社稷洞)의 북이영(北二營)에 영을 개설하였다가 1669년(현종 10)에 삼청동(三淸洞)으로 옮겨 세웠고, 1747년(영조 23)에 연융대(鍊戎臺)로 이건하였으며, 신영(新營)은 창의문(彰義門) 밖에 있었다.

총융대장은 수원 등지의 방어를 맡았다가 1747년에 경리청(經理廳)을 대신하여 북한산성의 수비까지 담당하였다. 총융대장의 휘하에는 중군(中軍) 1명, 천총(千摠) 2명, 파총(把摠) 4명, 초관(哨官) 20명이 있었다(『숙종실록』 36년 10월 3일).

총융대장은 도성의 경청에서 근무하였으며, 군병은 북한산성 등의 기보(畿輔)에 있었다. 국왕이 친림하여 합동으로 사열할 때에 수어대장은 전부(前部)를 담당했으며, 총융대장은 후부를 지휘하였다. 총융대장은 군사들을 합동으로 조련시키지 않고 윤차로만 하였다. 평상시의 훈련은 열진과 방진 두 가지뿐이었다.

총융대장은 훈련도감, 어영청, 금위영, 수어청의 대장들과 같이 국왕의 행행에서 도성을 방어하는 유도대장(留都大將)을 맡거나,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수가대장(隨駕大將)의 역할을 맡았다. 예컨대 국왕이 능에 거둥할 때는 창경궁 홍화문 밖에서 수어청과 교대로 유진(留陣)을 거행하였으며, 수어청이 남한산성으로 출진(出鎭)한 뒤로는 전담하였다.

용례

必須移設摠營於北漢下 地勢稍廣處 使摠戎大將 專任北城之固守 移設楊州邑治於弘福 先築山城 通峽路接應 則有表裏相倚之勢(『숙종실록』 36년 10월 3일)

참고문헌

  • 『만기요람(萬機要覽)』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