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융대(鍊戎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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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에 있던 돈대.

개설

탕춘대는 연산군대 설치하였으나 이후 도성 수비의 강화가 이루어지면서 탕춘대 일대에 축성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영조대 도성 방어의 강화를 위해 총융청을 탕춘대 지역으로 이동시켜 도성 수비 체제의 한 부분을 담당하게 하였다. 아울러 탕춘대를 연융대로 개칭하여 그 군사적인 성격을 강화하였다.

위치 및 용도

연융대는 북한산 아래쪽의 홍지문 뒤쪽 지역으로 오늘날 종로구 신영동 일대이다. 연융대 주변으로는 탕춘대성을 축조하였는데, 도성과 북한산성 사이에 위치하여 도성 방어에 중요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탕춘대성의 축조는 애초 남한산성과 함께 보장처로서 의미를 가진 것이었으나 점차 도성 방어 체제가 갖추어지면서 결과적으로는 도성을 사수할 수 있는 유력한 방어의 거점으로서 자리 잡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704년(숙종 30) 이후 이루어진 도성 및 북한산성, 탕춘대성의 수축은 3군문을 중심으로 한 도성 수비 체제의 물적 기반이 정비되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연융대로의 개칭은 그 군사적 성격이 강함을 반영한다.

변천 및 현황

북한산 아래쪽인 이 지역에 외창(外倉)을 설치하기도 하면서 외창 또한 별도의 방어시설이 필요하였다. 이곳을 적에게 선점당하면 산성에 이르는 통로가 막히고 군량을 빼앗기게 됨에 따라 이 일대에 토성을 수축하고 총융청을 옮기도록 하였다. 그 일환으로 북한산성 중성 축성이 완료된 직후 탕춘대성의 축성이 시작되었다.

1714년(숙종 40년) 북한산성 축조에 깊이 관여하였던 이유는 탕춘대 외창에 군량을 보관하고 그곳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는데, 북한산성과 도성을 잇는 성을 쌓자는 건의를 한 적이 있었다(『숙종실록』 40년 9월 25일).

형태

연융대의 지형은 성의 양편이 깎아 세운 듯이 우뚝 솟아 마치 문의 모양 같은 산이 있고 성안에는 나무를 묶어 세운 듯이 매우 산림이 울창하였다. 따라서 수량이 풍부하여 모든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이 성문 밖으로 흘러나가 폭포가 되는 실로 천연의 요새라고 할 수 있었다. 성안에는 우물이 4곳 있었으며 시냇물 두 줄기가 흘렀다.

탕춘대성은 도성과 북한산성을 잇는 인왕산 북쪽과 북한산 남쪽으로 뻗은 능선 상에 남북으로 축조되었다. 탕춘대성은 북한산성과 연결되는 선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안현을 통해 서울로 들어오는 주요 길목을 조망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이 있다. 이 탕춘대성은 북한산의 서쪽 외성 역할과 함께 창의문으로 들어오는 가까운 길인 것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18년(숙종 44) 윤8월에 탕춘대성의 축성이 시작되어 일시 중단되었다가 나머지 구간에 대해서는 이듬해 2월부터 공사가 재개되어 완성되었다.

탕춘대성은 북한산성과 도성을 잇는 연결 통로인 이른바 용도(甬道) 및 관문과 같은 성격의 성으로서 그 주된 축조 목적은 북한산성과 도성의 중간 지대에 군량을 보관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도성의 물자를 북한산성으로 옮겨야 할 상황이 올 경우, 그에 기민하게 대처하기 위한 시설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유사시에는 도성을 이용하여 방어를 수행하다가 위급 시 북한산성으로 도성민을 이주시키도록 하는 데 탕춘대성은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탕춘대성 역시 결과적으로는 도성 방위를 위한 관방시설로 기능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여지도서(輿地圖書)』
  • 노영구, 『영조 대의 한양 도성 수비 정비』,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
  • 이근호 외,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