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도(生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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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문관과 기술관를 양성하고자 각 기관에 소속시켜 공부하게 하던 학생.

개설

생도는 『목민심서』에 의하면 중국당나라의 제도에서 학관(學館)을 경유한 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경국대전』에서는 성균관, 사학, 향교 그리고 잡학(기술학)의 해당 관아에 소속되어 학업에 종사하는 학생의 무리를 지칭하였다. 생도는 학생과 마찬가지로 유학(儒學)뿐 아니라 잡학생(雜學生)까지 포괄하므로 지칭 대상 면에서 유생보다 더욱 포괄적인 개념이다.

담당 직무

『경국대전』에 의하면 생도는 유학생도와 잡학생도로 나뉜다. 유학생도는 성균관과 사학, 향교에 적을 둔 유생이다. 잡학생도는 한학·몽학·여진학·왜학의 사역원 소속과 전의감과 혜민서 소속의 의학생도, 관상감 소속의 천문학·지리학·명과학 생도, 호조(戶曹) 소속의 산학생도, 형조(刑曹) 소속의 율학생도, 도화서 소속의 화학(畵學)생도, 소격서 소속의 도학생도, 그리고 지방 부·목·군·현 소속의 잡학생도 등이 있었다. 유학생도는 성균관의 경우 정원이 200명인데, 여기에는 생원과 진사, 승보기재생(升補寄齋生)이 포함된다. 제학생도의 의장은 치포건(緇布巾)을 쓰고, 단령(團領)을 입으며, 조아(絛兒)를 띠었다. 다만, 유학생도는 청금(靑衿)을 입었다.

생도는 경우에 따라 유생의 명칭과 구분되기도 하였다. 1408년(태종 8)의 상제(喪制)에서 성균생원(成均生員)과 생도를 구별한다든가(『태종실록』 8년 5월 25일), 성균관 학생과 부거생도(赴擧生徒)(『태종실록』 11년 2월 20일), 성균관 생원과 학당(學堂) 생도(『세종실록』 4년 10월 8일), 사역원 한학(漢學)의 전함(前銜)·권지(權知) 생도(『세종실록』 10년 12월 20일) 등과 같이, 특정 직역이나 소속을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가 있을 때에는 생도와 상대를 구별하여 나타냈다.

이럴 때 생도를 직역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애매한 측면이 있다. 잡학 혹은 잡직에 소속된 생도로서 순수한 학생은 이를 직역으로 삼기도 하였다. 1625년(인조 3)의 「호패사목(號牌事目)」에서 ‘내시생도(內侍生徒)’, ‘삼의사생도(三醫司生徒)’라 한 것이 대표적이다. 1492년의 『사마방목』에는 생도를 전력으로 하는 합격자가 1명 보인다.

유학생도는 학교에서 제술(製述)과 강독에 전념하였다. 우등자에게는 생원 회시(會試)에 곧바로 시험 볼 수 있는 특혜를 주었으며(『세종실록』 14년 1월 15일), 매월 초8일과 23일을 휴가일로 지정하여 쉬게 하였다(『세종실록』 4년 10월 8일).

각 고을의 향교 생도의 수는 1406년(태종 6)에 정하였다(『태종실록』 6년 6월 27일). 그들은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었지만, 수령들이 이들에게 서역(書役)을 나누어 맡기거나 빈객(賓客)을 응대하는 등의 일을 시키기도 하여 이를 금지시킨 바 있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3일). 그리고 실농(失農)한 생도들에게는 방학을 주기도 하였다(『세종실록』 5년 1월 21일) (『세종실록』 5년 8월 21일). 나이 만 40세 이상의 교생은 학장(學長)으로 선발될 기회를 주기도 하였다(『세종실록』 7년 2월 14일).

잡과 생도들은 문서가 아닌 구전(口傳)으로 품계를 올려 주거나(『세종실록』 11년 7월 25일) 근무 때에만 녹봉이 지급되는 체아직(遞兒職)을 주고(『세종실록』 18년 윤6월 18일) (『세종실록』 30년 1월 23일), 의학생도는 지방이나 본가에 대한 잡역을 면제받았다(『성종실록』 3년 3월 14일). 의학생도들은 군사들을 치료하거나 역질이 퍼졌을 때 진찰·치료를 담당하기도 하였으며(『세종실록』 6년 2월 30일), 중국에 가는 사신 일행에 딸려 가기도 하였다(『세종실록』 7년 4월 15일). 역학생도 중에서 지방 거주자는 본가를 돌보아 주고, 또 서울에서의 생활비도 제공해 주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6년 1월 4일).

각 아문에 소속된 생도는 군역(軍役)을 면제받는 혜택이 있었다. 당시 군역은 고되었기 때문에 군역을 피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생도로 등록하는 경우가 많이 생겨났다. 그 폐해를 막고자 1676년(숙종 2)에는 「양정사핵절목(良丁査覈節目)」을 제정하였는데, 불법적으로 등록된 자들은 모두 충장위(忠壯衛)로 삼아 수행을 겸하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년 6월 15일).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목민심서(牧民心書)』
  • 『호패사목(號牌事目)』
  • 임민혁, 「조선 후기의 유학」, 『청계사학』8,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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