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장위(忠壯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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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초년에 편성되어 궁궐 밖 서영·북영의 숙위(宿衛)와 왕의 호위를 담당한 군인.

개설

충장위는 선조대의 청용청(廳勇廳)을 모방하여 광해군 초년에 설치한 일삭금군(一朔禁軍)을 고친 것으로, 전쟁에서 공적을 세운 군공자(軍功者)·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곡식을 바친 납속자(納粟者)·전쟁 중 적과 싸우다 죽은 전망자(戰亡者)의 자손 등을 소속시켰다. 충장위는 충순위(忠順衛)·충찬위(忠贊衛)와 함께 병조(兵曹) 소속의 유청군(有廳軍)이었다.

충장위가 설치된 해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14년(광해군 6) 4월 왕이 교외로 거둥할 때 충장위가 호위에 참여였다는 기록을 통해 1614년 4월 이전에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장위는 장수 3명과 군병 2천여 명으로 편성되었고, 12번(番)으로 나누어 1년에 한 달 동안 궁궐 밖에 위치한 서영(西營)과 북영(北營)의 숙위 등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한 충장위에게는 죽 등의 음식을 주어 군병의 노고를 위로해 주었는데, 때로는 음식 대신 돈이 지급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일진(日辰)에 자(子)·묘(卯)·오(午)·유(酉)가 들어 있는 중일(中日)마다 대궐 내에서 시행하던 활쏘기 시험인 중일시사(中日試射)나 무신당상록시사(武臣堂上祿試射) 등을 통해 성적이 우수한 충장위 군병은 과거 시험의 최종 시험인 전시(殿試)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 곧 직부전시(直赴殿試) 등의 상을 받았다. 하지만 5번 활을 쏘아 4번 이상을 맞추지 못한 충장위장(忠壯衛將)은 파직을 당하는 등 성적이 나쁘면 벌도 받았다. 1619년 경희궁 건설이나 1628년(인조 6)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 등과 관련하여 충장위에게 포(布)를 받고 번을 면제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충장위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충장위는 종2품이나 정3품인 충장위장 3명과 군병 2천여 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이나, 국가에 곡식을 바친 사람, 전사한 사람들의 자손 등을 충장위로 편성시켰다. 충장위는 12번으로 나누어 1년에 한 달 동안 입번(入番)하여, 궁궐 밖에 위치한 서영과 북영의 숙위를 담당하였고(『광해군일기』 7년 11월 8일), 1727년(영조 3) 왕이 종묘에 제사 지내고 남교에서 비를 빌기 위해 행차할 때 어가를 호위하였으며, 1725년과 1777년(정조 1)에는 왕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을 지켰다(『정조실록』 1년 5월 7일).

아울러 충장위는 궁궐 건설이나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 등을 마련하는 재원(財源)으로도 활용되었다. 실제로 1619년(광해군 11) 경희궁 역사(役事)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충장위의 번을 면제해 주고 대신 지방의 충장위에게는 포(布) 4필, 서울에 있는 충장위에게는 3필을 걷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2월 12일). 1628년(인조 6)에도 원하는 충장위에 한해 번을 면제해 주는 대신, 서울을 기준으로 먼 지역에 있는 원도(遠道)와 중간 지점에 있는 중도(中道)는 3필, 그리고 경기도·서울은 2필을 받아 사신을 접대하는 비용으로 활용하였다.

변천

충장위는 1614년 4월 군공자·납속자·전망자의 자손 3대 등으로 편성시켜 궁궐 밖에 위치한 서영·북영의 숙위 등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수십 년이 지나면서 전망자의 자손이 줄고, 1619년에는 지방 충장위에게 포 5필을 받고 번을 면제해 줌으로써 입번 대신 포를 납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때문에 광해군대 충장위 설치 당시에는 2,000명이었던 충장위가 1626년(인조 4) 900여 명으로 감소하였고, 1675년(숙종 1)에는 200여 명도 되지 못하여 병조 정랑 권경(權瓊)이 전망자의 현손(玄孫)도 입속시키자고 건의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1676년 「양정사핵절목(良丁査覈節目)」에서 각 아문에 모록(冒錄), 즉 법을 어기고 함부로 명단에 기록된 군관·무학(武學) 등을 찾아내 충장위에 이속시키도록 하면서 충장위는 7~8천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아울러 1681년 전망자의 자손이 없으면 무역한량(無役閑良)도 충장위에 충정(充定)하라고 하였고, 전망자의 자손을 한때 2대로 한정시켰다가 1717년 다시 3대로 회복시켰다.

더욱이 1717년 병조 판서 이건명이 충장위는 매년 포 1필을 바친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다른 역에 비해 부담이 가벼웠으므로, 출신(出身)이 스스로 입속(入屬)하거나 한정(閑丁)이 모속하는 소굴이 되었다.

한편 충장위는 1894년 갑오개혁 때 관제 개혁으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이준구, 『조선 후기 신분 직역 변동 연구』,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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