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관(知彀官)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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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지구관 |
한글표제 | 지구관 |
한자표제 | 知彀官 |
상위어 | 훈련도감(訓鍊都監), 삼수병(三手兵), 사수(射手), 군관(軍官) |
관련어 | 기패관(旗牌官), 총리영(總理營), 순영(巡營), 병영(兵營), 무위소(武衛所), 기효신서(紀效新書), 삼수기법(三手技法), 지구관청(知彀官廳)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왕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신명호 |
관품 | 비정규 군관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지구관(知彀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13년 11월 30일 |
조선후기 훈련도감, 총리영(摠理營), 순영(巡營), 병영(兵營), 무위소(武衛所) 등에 배속되었던 군관직.
개설
1594년(선조 27) 훈련도감이 설치되고 삼수병(三手兵)이 양성되면서 처음 설치된 군관직이다. 본래는 활을 사용하는 사수(射手)의 훈련을 담당한 특수기능의 군관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뒤에는 각 군영의 최상급 군관으로서 하급 군사실무를 담당하였다.
담당 직무
지구관이란 ‘활에 능통한 군관’이란 의미이다. 이 지구관은 서울의 훈련도감, 수원의 총리영(摠理營) 및 각 도의 순영과 병영에 배속되었으며 정원은 훈련도감과 총리영에 각 10명, 충청도의 순영에 4명, 병영에 6명, 전라도의 순영에 2명, 병영에 17명, 경상도의 순영에 4명, 좌병영에 8명, 우병영에 32명, 강원도의 순영에 8명, 황해도의 순영에 8명, 병영에 8명, 평안도의 순영에 40명, 병영에 4명, 함경도의 순영에 5명, 북병영에 4명, 남병영에 5명이었다.
오늘날의 준위나 상사 계급에 해당하는 군관직으로 당시는 장교라 칭했으며 주로 양반의 후예들이 임용되었으나, 일반 병사들이 진급하여 올라간 기패관(旗牌官)들 가운데에서 선발, 임용되기도 하였다. 지방의 군대도 훈련도감의 체제에 따라 속오군(束伍軍)으로 편성되면서 전국의 군영에 이 직제가 설치되었다. 훈련도감의 지구관은 만 20개월을 근무하면 병조에 통보하여 6품관으로 승진하게 하였다. 이들이 장기복무를 할 경우에는 정기인사 때마다 1명씩 정규 무관직에 임용되었다. 이들은 고참 군관들이었으므로 각종 훈련과 시험에서 특례가 인정되었고, 군영의 각종 제사의식 등에 집사로 임명되는 등 특별 대우를 받았다.
변천
조선후기의 5군영 중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중에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설치된 군영이었다. 임진왜란 중인 1594년(선조 27)에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대가 구사한 대일본(對日本) 격퇴 기예를 배우기 위해 임시 아문인 도감(都監)으로 설치되었다. 그 후 명나라 장수인 척계광이 펴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바탕으로 삼수기법(三手技法)에 의해 삼수병 중심의 군영으로 탈바꿈했으며 국왕 호위와 수도 방어를 담당했다. 훈련도감은 조선후기 오군영 가운데 핵심이 되는 군영이었는데, 『대전회통』의 직제에 의하면 정규 무관으로서 정1품의 도제조 1명, 정2품의 제조 2명, 종2품의 대장 1명, 종2품의 중군(中軍) 1명, 정3품의 별장 2명, 정3품의 천총 2명, 정3품의 국별장(局別將) 3명, 종4품의 파총 6명, 종6품의 종사관 4명, 종9품의 초관 34명이 배속되었다. 그 외에 시험으로 선발되는 지구관(『영조실록』 13년 11월 30일) 10명과 기패관 20명, 승차하는 별무사 68명, 별군관 10명, 권무군관 50명, 국출신 150명이 있었다.
지구관은 훈련도감 이외에 수원의 총리영 및 각 도의 순영과 병영에도 배속되었다. 한편 1873년(고종 10)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아 친정을 하게 된 고종은 궁궐 수비를 강화할 목적으로 1874년에 훈련도감의 병력 중에서 건장하고 날랜 자들을 선발해 내영(內營)을 창설하고 무위소(武衛所)라 이름하였다. 이는 장용위(壯勇衛)와 총위영(總衛營)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처음에는 대궐의 숙위만을 전담하다가 나중에는 수도방위 업무까지 맡게 되었다. 무위소를 총괄하는 최고책임자는 무위도통사로서 금위대장이 이를 겸임하였고 파수에 대한 감독이나 군사의 인솔 및 군수품 수송 등에 관한 일들은 특별히 뽑혀온 지구관이 전담하였으며, 이 지구관이 머무는 곳을 지구관청(知彀官廳)이라 하였다. 지구관청에는 입직하는 지구관이 매일 머무르며 파수병의 근무 상황을 살피고 외부인의 출입을 점검하는 등 궁궐수비에 전념하였다. 1881년(고종 18)에 훈련도감이 혁파된 뒤에는 지구관이 근무하는 핵심 부대는 무위소가 되었고,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신군제가 도입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만기요람(萬機要覽)』
- 『대전회통(大典會通)』
- 『지구관청일기(知彀官廳日記)』
- 김동주, 『장서각소장 한국본해제 : 軍事類』,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한국군제사 : 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1997.
-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의 변천』, 한국연구원, 1985.
-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http://www.history.go.kr)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시소러스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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