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장(木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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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집을 짓거나 기물을 만드는 장인.

개설

예로부터 각종 건물과 가재도구의 대부분을 나무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중에서 목재를 다루어 집을 짓는 기술자를 목수(木手) 또는 목장(木匠)이라 부른다. 반면 건축물에 달린 창문과 문·난간·건물 안에 비치하는 가구 등과 문방구·생활 용구 등 소품을 만드는 기술자를 소목장(小木匠)이라고 한다. 따라서 목장을 소목장과 구분하여 대목장(大木匠)이라고도 부른다. 목장은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뿐만 아니라 나무를 선별하고 마름질하여 목재를 준비하는 과정과 그 건물의 설계와 감리까지 담당하는 현대의 건축가나 다름없다.

담당 직무

궁궐이나 관아(官衙), 사찰, 민간 주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건축물은 나무로 지어졌다. 따라서 목재로 집을 짓는 기술자인 목장은 국민들의 생활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목장은 목수·목공(木工)·목공장(木工匠)·대목(大木) 등으로 불렸으며, 경공장(京工匠)외공장(外工匠)으로 활동하였다.

궁궐이나 사찰 등 특히 규모가 큰 공사에는 여러 명의 목장이 동원되었으며, 목장 외에도 기와를 굽거나 기와나 이엉을 잇는 기와장[蓋匠], 건물 벽에 흙을 바르는 미장이[泥匠], 건물 외벽과 공포에 칠을 하는 가칠장(假漆匠)과 단청장(丹靑匠), 돌을 다루는 석수(石手) 등 건축과 관계된 여러 장색이 동원되었다. 그중 가장 비중이 큰 목장 중 우두머리는 대목 또는 도편수(都片手)가 되어 여러 목장들과 다른 장인들을 통솔해 대규모 공역을 감당하였다. 도편수는 집을 지을 때 집터와 건물의 용도, 격에 맞춰 건물을 설계하고 목재를 선별해서 마름질하여 자재를 준비한다. 그리고 다른 장색들과 함께 시공한 뒤 감리까지 담당하기 때문에 소임이 막중하다. 즉 도편수는 기본적인 먹줄 튕기는 기술부터 시공 능력, 제도 능력까지 높은 기술적 숙련도를 갖추어야 했음은 물론 고금의 뛰어난 건물에 대한 지식을 지녀야 했고, 설계에서 완공에 이르는 모든 공정을 책임지고 조직을 이끄는 지휘력도 갖추어야 했다.

나라의 크고 작은 건축 사업을 담당하던 목장들은 교서관(校書館)·군기시(軍器寺)·귀후서(歸厚署)·내수사(內需司)·선공감(繕工監)·조지서(造紙署) 및 각 도(道)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음을 여러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선공감에 목장 100명을 선정하여 올리도록 하는 기록이 있으며(『태종실록』 15년 4월 10일), 목공장이 금속을 다루는 철야장(鐵冶匠)·대나무로 기물을 만드는 죽장(竹匠)과 더불어 사사로이 무기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을 벌하였다는 사실도 기록되어 있어 당시 목장의 규모와 활동을 엿볼 수 있다(『세종실록』 20년 11월 25일). 또한 세조대에도 선공감에 100명의 목장이 소속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장인보다 현격하게 많은 수였다(『세조실록』 6년 8월 1일).

특히 조선에서는 국가적인 영건 사업에서 막중한 임무를 맡은 대목장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였는데, 숭례문 상량문 기록을 보면 세종대인 1497년의 숭례문 개축공사 때는 도편수가 정3품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건축에 관계된 장인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불릴 뿐 아니라 기술이 세분화되면서 새로운 명칭이 생겨나기도 한다. 『경국대전(經國大典)』 「공전(工典)」 ‘경공장’에는 건축과 관련된 장색으로 목장·석장(石匠)·조각장(彫刻匠)·개장·이장·벽돌을 만드는 전장(磗匠)·단청 등 도색을 맡은 도채장(塗彩匠)·온돌을 놓는 돌장·와장(瓦匠)·잡상장(雜像匠) 등이 등장한다. 그러나 18세기 말 수원성 축성 당시의 기록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는 『경국대전』에서 볼 수 없던 대·소인거장(大·小引鉅匠)·지거장(歧鉅匠) 등이 새로 등장한다. 또 목장·석장의 경우도 목수·석수로 기록되는 등의 변화를 보인다.

19세기 중엽 조선 철종 때의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에서는 도편수와 부편수가 있어 공사 전체를 주관하였고, 기둥과 보 및 지붕구배는 정현(正絃)편수, 공포 짜는 일은 공도(工蹈)편수, 서까래를 깎아 거는 일은 연목(椽木)편수가 분담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어 목공과 관련된 장색이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변천

목조건축 문화 전통을 이어온 우리나라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목장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헌 기록상 목장은 통일신라시대부터 등장한다. 도시 행정을 관장하는 전읍서(典邑署)에 목척(木尺) 70명이 소속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목수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조선시대 선공감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선공시(繕工寺)와 도교서(都校署)에 목업(木業)이라는 명칭으로 분류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로 벼슬이 주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경공장으로서 선공감 등 여러 관서에 소속되어 활동하였으며, 뛰어난 도편수에게는 최고 정3품까지의 벼슬이 주어졌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인정전중수의궤(仁政殿重修儀軌)』
  • 강만길, 『조선시대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 국립문화재연구소, 『대목장』, 1999.
  • 김동욱, 『한국공장사 연구』, 기문당, 1993.
  • 주남철, 『한국건축사』, 고려대학교 출판부,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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